걸어서 지구 한바퀴/여행 일정표

중국 위해 여행 일정 (5박6일)

이쁜 비올라 2012. 8. 23. 22:21

 

중국 위해 여행 일정표

 

 

 

 

여행 기간 : 2012년 8월10일(금) - 8월15일(수) 5박6일

 

비행기 일정

 

8월10일(금) 오후 3시20분 부산 출발 (CA 5036) 아시아나 항공 공동 운항

8월10일(금) 오후 3시50분 중국 위해 공항 도착

 

8월15일(수) 오후4시50분 중국 위해 출발(CA 5035)

8월15일(수) 오후7시20분 부산 도착

 

 

 

 

 

 

 

 

 

 

중국 화폐: 위안(Yuan)

화폐단위 : 100/50/20/10/5/2/1

2012년 8월 현재 1위안이 한국 돈 178원 정도

한국에서 위안으로 바꾸어 가도 좋고

한국에서 미국달러로 바꾸어서 가서 중국 가서 위안으로 바꾸면 더 유리

 

전화 걸기

중국에서 한국으로

001-82(한국 국가번호)-지역번호(0을빼고)-전화번호

예) 통영 055-644-6303 001-82-55-644-6303

 

한국에서 중국으로

예) 152-6613-0604 /001-86(중국국가번호)-152-6613-0604

예) H P:139-6458-0476 /001-86-139-6458-0476

 

[여행 준비물]

여권, 전자항공권, 비자, 모자, 선글라스, 썬크림, 반팔티, 얇은 긴티, 카메라

중국여행 일정표, 핸드폰, 세면도구, 수건, 카메라 충전기, 핸드폰 충전기,

정로환, 소화제, 참치, 김, 라면, 중국위안

 

[중국시차] 한국보다 - 1시간 느림

[비행시간] 1시간30분

 

[중국입국]

1)비행기 탑승 후 노란색의entry card(입국 신고서) (入境卡/入境登记卡) 작성

2)공항 도착 후 Immigration 이라는 표시를 따라가면 입국심사대 나옴

3)입국 신사대에서 기입한 입국 신고서와 여권과 비자를 심사관에서 건네준다.

4)여권에 도장 찍어줌

5)수하물을 찾는다.

6)면세품은 짐 가방안에 넣어 공항 직원에게 되도록 보이지 않게 하기

7)신고 물품 없으면 Nothing to Declare 라고 쓰여진 녹색라인 통과

(2005년 이후부터는 세관신고서를 필히 작성하여 제출하여야 입국 가능)

 

[출입국 및 기내에서 사용되는 용어]

出入境登记卡 ru4 jing4 deng1ji4 ka3 출입국신고서

旅客行李申报单 lv3 ke4 xing2li shen1 bao4 dan1 여객물품 신고서

关税 guan1 shui4 관세

机场税 ji1 chang3 shui4 공항세

免税店 mian3 shui4 dian4 면세점

班机 ban1 ji1 정기항공편

包机 bao1 ji1 전세기

手提行李 shou3 ti2 xing2li 휴대수하물

拖云行李 tuo1 yun4 xing2li 위탁 수하물

救生衣 jiu4 sheng1 yi1 구명조끼

氧气面具 yang3 qi4 mian4 ju4 산소 마스크

呕吐用袋 ou3 tu4 yong4 dai4 구토 용지

 

[중국 입국 카드 작성 요령]

 

① Family Name : 성② Given Names : 이름③ Passport No : 여권번호④ Visa No : 047140⑤ Place of Visa issuance : 비자 발급지⑥ Flight No, Ship Name, Train No : 교통수단 편명(비행기,배,열차)⑦ From : 출발지(어디에서 출발했는지)⑧ Intended Address in China : weihai hotel⑨ Date of Birth : 생년월일⑩ Male/Female : 성별(남/녀)⑪ Nationality : 국적 (KOREA)⑫ Your Main Resson for Coming to China (one only) : 입국사유를 체크⑬ SIGNATURE : 서명란 (여권의 서명과 같게)⑭ Date of Entry : 입국일자

[중국출국]

1)위해 국제선 터미널 항공사 카운터에서 체크인 후 보딩패스

출국 신고서는 파란색이다.

2)출국심사(여권, 출국카드, 비행기표)

 

 

① Family Name : 성② Given Names : 이름③ Passport No : 여권번호④ Nationality : 국적 (KOREA)⑤ Flight No, Ship Name, Train No : 편명(비행기,배,열차)⑥ Destination : 목적지(행선지)⑦ Address in China : 중국내 주소 (머물렀던 곳의 주소)⑧ Date of Birth : 생년월일 (여권상 생년월일)⑨ Male/Female : 성별 (남/녀)⑩ Your Main Resson Departure form China (one only) : 출국사유 (한가지만 선택)⑪ SIGNATURE : 서명란 (여권의 서명과 같게 합니다.)⑫ Date of Departure : 출국일자

1번 중국내 거주주소나 전화번호는 중국 민박 전화 번호 나 로밍한 본인 휴대폰적기

[중국의 교통수단]

(1)기차:중국의 기차는 6종류

. 초고속 열차: 한국의 ktx와 같음 .약 240km속도 z 열차는 정차역이 거의 없고

d 열차는 주요역마다 정차. 비행기 요금과 비슷 ...엄청비쌈

. 직달 열차: z 열차로 불림 160km 속도, 직통열차로 노선이 몇 개 없다.

. 특괘 열차: t 열차로 불림 130km 속도, 노선이 많고 전국을 커버함.

. 쾌속 열차: k열차로 불리고 중, 소도시로 연결하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

. 내부 열차: n열차로 불리고 원래 가까운 거리의 대도시 사이 연결

최근에는 장거리 구간도 운영/40% 에어컨 장착되어 있음

. 보통 열차: 4자리 숫자로 된 기차. 가장 많은 노선 보유, 완행 열차

30% 정도만 에어컨 장착/ 낙후된 기차

 

* 중국 기차의 객차등급

경좌: 딱딱한 의자 차(잉쭤라고 발음) 가장 낮은 등급으로 예약이 안되고, 입석 허용, 출발 당일 역에서 바로 구입 / 표 사는 줄 엄청 길다.

연좌: 푹신한 의자 차(루안쭤라고 발음) 대도시와 도시로 연결, 입석 허용 안됨.

잉쭤보다 60%나 요금이 비싸다.

경와: 딱딱한 침대 차 (잉워라고 불림) 배낭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

잉쭤보다 80% 비싸다.

연와: 푹신한 침대 차 (루안워라고 발음) 중국 기차 등급 중 최상급

잉쭤와 비교 요금은 3배 정도 비싸다.

 

(2)버스

.보통버스: 요금저렴, 아주느림, 에어컨 없음. 곳곳에 차를 세운다

.호화버스: 고속버스에 속함. 에어컨 완비. 지정좌석.

.침대버스: 야간이동시 이용 편리, 지저분함(일부 베이징,상하이제외)

(3)여객선: 한때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으나 현재 사라져가고 있다

(4)지프

티벳이나, 실크로드 지역에서 주로 이용, 대중교통이 없는 경우 이용

요금은 엄청비쌈/ 1대 렌트에 약400-1,200원(중국돈)

 

[중국의 숙박시설]

(1)호텔: 다양한 이름으로 사용

저렴한 숙소는 여관이나 여사라고 이름.(외국인이 투숙하지 못함)

설비의 규모에 따라 빈관,반점, 대주점이라는 이름 사용

호텔의 등급은 별로 표시 별5개가 최고급 호텔

(2)초대소: 공무원,군 관계자들을 위한 내부자 숙소, 내부인에게도 개방

외국인 투숙 금지/ 작은 기업이 운영하는 초대소 시설 안좋은

군대나 중앙정부에서 운영하는 초대소는 3성 호텔급/요금 저렴

(3)유스호스텔: 기본 시설은 별2개급/ 대부분 객실은 도미토리/ 숙소안에 인터넷.여행사.식당등 편의시설 입점

(4)민박 : 법률적으로 불법/한국인들은 곧잘 이용함. 조선족, 중국교포에 의해 운영

간혹, 물건 분실, 상식밖의 손님 응대등이 끊이지 않음

 

[여행 언어]

나 (워) 너 (니) 그/그녀/그것(타) 우리(워먼) 그들(타먼) 이름(밍즈)

한국(한궈) 중국(중궈) 미국(메이궈) 일본(르번) 오늘(진텐) 내일(밍텐)

모레(허우텐) 이것(쩌거) /저것(나거)

 

안녕하세요(니 하오)

고맙습니다(셰 셰)

별 말씀을요(베커치)

죄송합니다(부하오이쓰) 미안해(뚜이부치)

또는(두이부치) 잘있어(짜이찌엔)

이름이 뭐예요?(니 자오 선머 밍쯔)

김성남입니다(워 자오 진청난)

당신들 어느나라 사람이죠?(니먼 스 나 궈런)

우리는 한국인이예요 (워먼스 한궈런)

 

(숙소를 잡을때)

방(팡젠) 욕실(위스) 화장실(시쇼우젠) 휴지(웨이성즈) 침대(촹)

에어컨(콩탸e) 텔레비전(덴스) 전화(덴화) 침대시트(촹부) 이불(베이쯔)

베개(전터우) 등록(덩지) 보증금(야진) 보증금영수증(야진단쯔) 열쇠(야오스)

체크아웃(투이팡) 종업원(푸우위안) 여권(후자오) 비자(첸정)

 

(숙소에 묵울때 실용회화)

여기 빈방 있나요(저얼 유 쿵팡 마) 있어요(유)

하룻밤 묵는데 얼마죠(이거 완상 둬사오 첸) 30원이예요(싼스 콰이첸)

방 좀 볼 수 있을까요(넝 칸 팡젠 마) 맘에 들어요(시부시환)

다른 방이 있나요(유메이유 볘더 팡젠) 좋네요 , 여기 묵을께요(하오, 워 주짜이 저얼 바)

자, 등록을 해야해요. 여권을 보여주세요(야오 덩지, 게이 워 칸이샤 니더 후자오)

보증금은 30원이예요(야진 싼스콰이첸)

 

(숫자 중국어)

일(이) 이(얼) 삼(싼) 사(쓰) 오(우) 육(류) 칠(치) 8(바) 9(주) 10(스) 0(링)100(이바이)

이바이치엔(100원) 이바이싼(130원) 200(얼바이,량바이) 거스럼돈( 링첸) 슈퍼마켓(차오스)

원( 콰이) 1000(이 치옌 콰이) 9000(주 치옌 콰이)

1개(이거) 2개 (량거, 얼거)3개(싼거)10개(스우거)

 

(물건을 살 때)

종업원 부르기(푸우위옌!)

이거 얼마예요 (쩌거 뚜어샤오치엔)

사과 얼마예요 (핑궈 뚜어샤오치엔)

한 근에 2원 (이진 얼 콰이 첸)

너무 비싸요(타이 구이 러) 몇 개? (지이 거?)

깍아주세요(게이 워 펜이뎬) 좀 깍아줘(피엔이 디얼바)

 

(식당에서)

아침식사(짜오판) 점심식사(우판) 저녁식사(완판) 밥(미판)

야채반찬(쑤차이) 고기반찬(훈차이) 국(탕) 주문하다(뎬차이)

밥그릇(샤오완) 수저(탕츠) 젓가락(콰이쯔)

흰죽(시판) 볶음밥(면) (차오판(뎬)

국수(뎬탸오) 빵(뎬바오) 계란(지단) 돼지고기(주러우) 소고기(뉴러우)

닭고기(지러우) 양 꼬치( 양 러우촨) 영수증(파퍄오) 계산(제장(마이단)

 

(식당회화)

환영 어서오세요 (환잉환잉) 종업원이 하는 대사

앉아 앉아 (칭쭈모 칭쭈모)

주문하실래요(니 야오 덴차이 마)

밥 한 공기랑 위샹러우쓰 주세요(이완 미판 허 위상러우쓰)

고수는 넣지 마세요(부야오팡 상차이)

밥 (뜨거운 물) 좀더 주세요 (자뎬 미판(카이수이) 바)

나에게 차를 좀 주시오 (칭 게이워 차쉐이)

맛있어요(하오츠)

아저씨 계산이요 (라오반, 마이단)

 

(장소를 물을때)

(화장실) 어디있나 (시쇼지옌)짜이 나알?

(식당) 찬팅 짜이나알?

(호텔) 판디옌 짜이나알?

(기차역) 후어츠짠 짜이나알?

(시내버스 정류장) 꽁꽁치츠 짠 짜이나알?너 어느 나라 사람이니(니 나 궈런?)

한국이다(워 한구어 런)

말을 못 알아들을때(팅부동 짜이찌엔)

 

(발마사지 샾에서)

안아파 (뿌통뿌통)

몇 살이니(진니옌 뚜모따러) 22살( 얼스 얼쉐이)

 

[중국의 물가]

하룻밤 숙박 : 장급 여관 20,000-32,000원

식비 : 서민 식당 한끼 2,500- 5,000원

시내 교통비: 하루1,000원 정도

택시 : 하루 최소 6,000원12,000원

입장료 : 중국에서 가장 선진국 수준 물가

어지간한 볼거리들은 모두 7,500원 이상 /30,000원이 넘는곳도 있음

시민공원 성격을 띤 모든 곳에서 입장료를 징수하는게 특징

중국 술값: 맥주 1병 400원 /고량주 900원 /식당 카페에서 술값 저렴

 

[여행 일정]

 

[위해시에 관해서]

산동반도의 북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및 중국북방의 중요한 군항중의 하나로 청 해군 북양함대의 군항이 있었던 곳이며, 옛 이름은 웨이하이웨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위해라고 이름이 고쳐졌으며, 1987년 시로 승격 되었다. 원래 위해위하는 이름은 홍무 31년(1398년)에 왜구의 습격에 대비해 이곳에 기지가 만들어지면서 붙여진 것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잔재인 부두, 포대가 앞바다인 유공도등에 남아 있다.

1984년 중일갑오전쟁이 이곳에서 발발했으며, 1898년 영국에 주도권이 넘어갔다가 1930년에 다시 되찾은 역사가 있는 곳이다.

위해시의 총 인구는 약 270만 정도이며 경공업, 조선업, 농수산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위해시는 중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뽑히기도 했는데 해변을 따라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시 전체자 깨끗하고 아름다원 보인다. 이곳에는 유공도와 성산두의 국가급 명승지 외에 “바다에 있는 선상의 조상” 이라 불리는 곤영산과 중국에서 제일 큰 호수인 천아호 등의 유명한 관광지가 자리하고 있다.

위해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온대해양성기후를 보이며, 연평균 기온은 12도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800mm로 겨울과 여름에 그다지 춥거나 덥지 않아 4계절 여행 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기후가 이렇다 보니 골프를 즐기로 오는 사람들도 많다.

 

[위해 민간 풍속]

위해 지역의 시민들은 오고 가는 끈끈한 정으로 인간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마치 자연스럽게 생긴 관습처럼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혼을 축하하는 방식으로 “다리를 보면서(望轿)””경사를 축하한다(看喜)”는 말이 있다. 이웃이나 친구가 결혼 할 때면 선물을 준비하여 축하를 보내는데 이를 경사를 축하한다-칸시(看喜)라고 한다.

 

신랑 쪽에 주는 선물은 일반적으로 닭이나 돈을 주게 되고, 신부 쪽은 계란이나 결혼용품으로 세수대야, 거울, 침대커버, 밥상커버, 옷감 등이 있다.

신랑 신부는 선물을 받은 후 꼭 기록을 하게 되고 연회를 베풀어 손님들을 접대한다. 손님은 식사가 끝나 돌아갈 때 떡의 일종(麦子 혹은 大饽饽)을 답례로 가지고 가게 되는데 이를 “야빠오푸(压包袱)”라고 부른다.

 

건국초기 농촌에서는 대부분 이런 풍속을 유지하였으나 도시주민들은 점차적으로 새로운 방식의 결혼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부터 신혼 축하 방식으로 직접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아졌고 점차적으로 액수도 몇 십 위엔에서 몇 백 위엔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결혼 축하선물을 준 사람에게는 꼭 연회를 베풀어 접대를 하게 된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풍속은 지금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 태아의 출생으로 친척과 친구, 이웃, 산모의 친정 집에서는 모두 축하를 하게 되는데 이를 경사를 축하한다-칸시(看喜), 칸환시(看欢喜) 혹은 출생 8일 축하-츠빠르(吃八日)라고 한다.

 

축하 시 선물은 보통 계란, 좁쌀, 흑설탕, 꽃다지 옷감, 아기 옷 등으로 한다. 경사가 있는 집에서는 계란을 삼아 계란표면에 붉은 색깔을 칠해 친척, 이웃들에게 나누어 경사를 알린다.

 

아기출생 12일째 되는 날에는 친척, 친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데 이는 “12일 축하연(过十二日)”이라 부른다.

아기가 1개월 되면 산모와 아기는 외가집에서 일정한 기간 지내게 되는데 이를 “달을 채우다(住满月)”라고 한다. 이때 아기의 외가집에서는 아기에게 장수목걸이, 팔찌, 발찌 등 장신구와 밀가루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는 아기의 무사함을 바라는 뜻에서 “장수거멀(长岁锔具)”이라고 한다.

 

아기가 백일 되는 날에는 외할머니, 고모, 이모 등이 모여 축하를 하게 되는데 이는 “백세생일(过百岁)”이라 한다.

아기가 돌을 지낼 때에는 모든 친척, 친구들을 요청하여 연회를 베푸는데 서예 붓, 화살이나 칼, 도량형 기구, 과일, 케익, 옷, 완구 등을 상에 올려놓고 아기가 선택하게 한다. 이로써 아기가 흥미로워 하는 것이나 취향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데 이를 “생일을 잡다(抓生日)”로 부른다.

 

아기가 만 3살이 된 후에는 거의 친척, 친구들을 요청하여 생일을 축하 하는 일이 없다. 건국초기에는 이런 풍속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80년 대 후부터 선물이 많이 다양해지고 연회의 내용도 풍부해지고 있다.

 

노인의 환갑에는 자녀들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장수를 축하하게 된다.

66세 때는 매우 크게 축하하는데 이를 “육육대순대길(“六六”大顺之吉)”이라 한다. 하지만 60세가 되었는데 연장자가 있으면 환갑을 쇠지 못하게 된다. 환갑의 규모는 가정의 경제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부유한 가정인 경우에는 성대한 연회식을 진행하여 자손, 친척, 친구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하게 되고, 일반적인 가정인 경우에는 장수면(국수)을 대접하면서 장수를 축복하게 된다. 환갑 후부터는 매년마다 생신을 축하하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노인의 생신을 잊고 쇠지 않을 경우에는 자녀들이 불효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70년 대 말부터 도시주민들의 환갑에는 장수떡(大寿糕), 생일케익(生日蛋糕) 등 새로운 형태가 추가되었고 연회의 내용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연령 제한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집들이는 “가마 덥히기(温锅)”라고도 한다. 새집들이 혹은 분가 시에는 기혼한 형제 자매들이나 여자 쪽의 가족이 모여 축하를 하는데 선물로는 일반적으로 식량, 솥, 그릇, 주걱, 대야 등 생활필수품으로 한다. 80년 대 후부터 회사 직원이 새 집들이를 하게 되면 동료직원과 친척, 친구들이 모두 모여 축하연을 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집을 짓는 것이 큰 경사로 가장 큰 지출이 되어 보통 한 동네에서 누가 집을 짓게 되면 온 동네에서 서로 나서서 돕게 된다.

 

민간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을 “좌석(坐席)”이라 한다. 식사 시 일반적으로 남자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데 여자손님도 남자주인이 접대를 하여 정중함을 표시한다. 집에 오직 여자와 아이만 있을 때는 손님이 식사를 마친 후 식사하는 것이 예의다. 평일에 손님이 오게 되면 일반적으로 아랫목에 앉히고, 연회가 있을 때에는 순서에 맞게 배치를 하는데 자리순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연회는 관연(官宴), 민연(民宴)으로 구분되는데, 관연은 대형 연회로 보통 관료들이 참석하는 자리로 상석을 중앙에 배치하고 중앙의 왼쪽이 2석(二席), 오른쪽이 3석(三席)이 된다.

 

민연은 항렬, 연령 등에 따라 자리를 배치한다. 좌석의 배치는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손님의 불만을 살 수가 있는데 심각한 경우에는 손님이 자리를 뜨거나 상을 엎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주인은 사과를 해야 하며 새로 좌석 배치를 하게 된다. 연회 시작 시에는 순서대로 착석하고 술을 권한다.

 

식사도 손님이 우선이고 요리를 올릴 때에도 주요 좌석부터 순서대로 올리는 것이 예의에 맞다. 옛날에는 온돌에는 긴 밥상을 차리고 온돌이 없는 곳에는 네모 밥상을 차렸는데 70년 대 후부터 점차적으로 원형 밥상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밥상을 놓을 때에도 나무 세로무늬가 남북방향으로 놓이게 해야 하고 한 개 밥상은 8인 기준으로 한다.

 

요리와 술의 수량은 제한이 없으나 꼭 짝수로 올려야 하며 일반적으로 8개 요리와 4개 국류(탕)로 한다. 음주 전에는 케익을 먼저 올리고 술이 끝난 후에는 6개 요리를 올려 밥 반찬으로 한다. 요리를 올리는 순서는 닭고기요리가 우선, 중간에 생선요리, 마지막에 냉채로 한다. 생선요리를 올릴 때 물고기 머리부분은 5,6석 사이로 향하게 하고 물고기 배 부분이 상석을 향하게 한다. 생선요리를 올리면 술잔에 있는 술을 모두 마신 후 생선요리를 먹을 수 있다. 주식으로는 국수, 쌀밥, 과일 3가지 중에서 선택한다. 80년 대 후 연회석상의 예의는 전통을 유지하는 외에 일부 새로운 풍속이 생겼는데, 예를 들면 생선요리를 올린 후 손님은 주인의 요구에 따라 술을 여러 잔 마신 후 생선요리를 들 수 있다. 요리도 점차 다양해져 정식 요리가 오르기 전에 4~6가지의 냉채를 올리는데 돼지내장이나 해파리의 갓 같은 해산물, 소시지, 땅콩 등으로 술 마시기 전에 식사를 약간 하게 되고 술 마신 후에는 보통 물만두(水饺)나 국수를 주식으로 올린다.

 

8월10일(금) 3시50분 중국 위해 공항 도착

화하성 예술 공연 관람(위해 최고의 볼거리)

시정부 광장(시청 광장)

시정부 시민 광장은 갖가지 문화 행사가 행해지는 위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저녁 시간이 되면 매일 저녁 남녀가 쌍쌍이 춤을 추는 무대가 된다.

이런 모습들은 중국 곳곳에서 볼 수가 있는데 정부에서 장려 한다고 한다.

 

8월11일(토)

유공도(위해 항구 옆쪽에 KFC랑 피자헛 옆으로 유공도 들어가는 배 탈 수 있음

선비와 입장료는 138위안)

위해 시내에서 동쪽으로 2.1 해리에 있는 곳으로

유공도는 말 그대로 유씨네 살던 곳으로 동한 말년에 유씨 황족 중 일부 사람들이 당시 가혹한 핍박에 의해 이 섬으로 피난 왔었다고 하는데 그 후 유씨들은 늘 위험에 처한 선민들을 이 섬에서 도왔기에 선민들과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 유씨들을 기념하기 위해 유공사를 지어 유공을 모셨으며 이 섬을 유공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공도는 북경, 상해의 문호를 지키기 위해 해안 방위상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곳은 해군 조청부 북양수사가 태어난 곳으로 중. 일 갑오전쟁의 전쟁터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갑오전쟁 기념관, 북양수사 충정비, 중화병기관, 양해군제독서등이 있다.

유공도는 위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약 20분정도 걸린다.

 

유공도는 위해만 안에 있으며, 부두에서 배를 타고 약 20분 정도 걸리는 2.1해리 거리에 있다. 남북 양안에 있는 작은 반도와 맞물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섬은 예로부터 동쪽 모서리를 지키는 울타리 또는 ‘가라앉지 않는 전함’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동서로 길이가 4.08Km, 남북으로 폭이 1.5Km이며, 전체 면적이 3.15평방Km인 이 섬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가장 높은 기정산(旗頂山)은 해발 153.5M이다. 북쪽의 언덕은 경사도가 높은 절벽의 형태이며, 남쪽은 경사도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섬 전체에는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수종은 흑송이 주를 이룬다. 1985년 국가산림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유공도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동한 말년 황족인 유씨 일가가 이곳으로 피난을 했기 때문에 ‘유도(劉島)’, ‘유가도(劉家島)’, ‘유공도(劉公島)’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민간에 내려오는 유공(劉公)과 유모(劉母)에 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수 백 년 전에 남방으로부터 상선 한 척이 바다를 통해 북방으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변하면서 광풍이 불어오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거친 풍랑과 싸우면서 하늘에 기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풍랑은 멈추지 않고 점점 배를 뒤집을 듯이 거세게 몰아쳤다. 식량과 식수가 바닥이 나자 선원들은 파도에 밀리며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갑자기 눈앞에 한 줄기 불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간신히 배를 몰고 다가가자 그곳에는 사람들이 사는 섬이 있었다. 해변에 있던 벼랑에 노인이 앉아서 등불을 비추며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배가 해안에 정박하자 노인은 선원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노인은 자신의 성이 유씨이며, 사람들은 유공이라 부른다고 소개했다. 유공의 아내인 유모도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유모는 선원들에게 밥을 짓고 있었다. 굶주렸던 10여명의 선원들은 허겁지겁 솥에서 밥을 퍼먹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밥을 먹어도 솥 안에 있는 밥은 줄지 않았다. 선원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구해준 노인부부가 신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머리를 들어 감사를 드리려고 했지만 이미 노부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선원들은 자신을 구해준 노부부에게 감사를 드리며 섬에 살고 있던 어민들과 힘을 합쳐 유공과 유모의 사당을 지었다. 이 섬을 유공도라고 부른 이유는 이러한 전설 때문이다. 지금도 섬의 동쪽에는 바다를 향해 등불을 들고 선박을 인도하는 유공의 조상이 서있다. 유공의 도움으로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원을 담았을 것이다.

출토된 유물을 고증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시대에 이미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섬의 동남쪽에는 당시에 사람들이 살았던 터가 남아 있다. 한대에는 유씨들이 이 섬으로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살았으며, 명초에 왜구가 침략을 하자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켰다. 가정 년간에는 왕헌무(王憲武)가 농민기의군을 이끌고 이 섬을 점거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만력 말년에는 등주부에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지를 개간하게 하는 한편, 군대를 진주시켰다. 당시에는 남북으로 해운업이 발달하였으므로 이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청의 강희 2년인 1663년, 유공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섬주민들 모두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1690년 이후로 총(叢), 추(鄒), 강(姜) 등의 3성씨들이 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1703년에 또 다른 농민기의군이 유공도에 주둔했지만 곧 진압되어 도주했다.

광서 년간에 청정부가 북양해군을 창건하자 유공도는 해군기지로 변했다. 북양해군은 이곳에 공정국, 기기창, 둔매소(屯煤所-연료창고)와 같은 대규모의 군사시설을 건설했다. 나중에는 전보국, 건제관서(建提官署), 부두, 포대, 해군사관학교와 같은 시설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주민들의 수도 늘어났다.

1895년 중일전쟁으로 북양해군이 전멸하자 일본군이 유공도를 3년 동안 점령했다. 1898년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다투어 갈라먹은 와중에서 영국이 위해를 차지하자 유공도도 함께 넘어갔다. 1930년까지 유공도는 32년 동안 영국군이 점령했다. 영국군은 원래의 건축물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의 땅을 모두 매입하고 그곳에 영국의 원동해군사령부와 주택, 병원, 교회, 감옥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식당, 술집, 클럽, 축구장, 우체국, 해군묘지를 설치하기도 했다. 유공도는 영국해군의 하계 휴양지로 변했다. 1930년 국민당군이 유공도를 다시 찾았다가 1948년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이 섬을 차지한 중공정부는 4차에 걸쳐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하나는 유공도의 거주민 가운데 유씨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들 가운데 어민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1948년 12월 중공군이 점령한 유공도는 그 이후로 곧바로 군사시설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 4월 정식으로 개방된 유공도는 우선 정부에서 1,000만위엔을 투자하여 북양해군제독서, 정여창이 살던 집, 용왕묘, 북양수군학당, 옛 포대, 병기전시관, 유공묘, 수족관, 중일전쟁전람실, 북양해군충혼비를 복구하거나 새로 건설했다. 섬은 수도, 전기, 도로, 통신 등의 기반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19척의 선박이 수시로 운행을 하게 되었다. 600만 위엔을 투자하여 새로 건설한 부두는 1993년부터 사용이 가능해졌다. 1988년 국무원은 유공도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와 국가급 풍경명승지역으로 지정되었다.또한 유공도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각종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한다.

매년 4월에서 10월까지는 가장 많은 여행객이 몰려드는 기간이다.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지도자 강택민, 이붕, 주용기, 교석, 이철영(李鐵映), 송건(宋健) 등이 이곳을 다녀가기도 했다. 중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강택민은 ‘갑오전쟁박물관’이라는 제호를 썼으며, 이붕은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以史以鑑)’는 제사를 썼다. 교석은 ‘역사의 교훈을 새겨 넣어 4가지의 변화를 도모하고, 조국을 동방에 우둑 세워 평화와 안정을 이루기 위한 굳건한 지주로 만들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 유화청(劉華淸)은 ‘갑오전쟁의 지사들은 영원히 살아남아 국가를 보위하고 광영을 이루게 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전기운(田紀雲)은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의기는 구름이 되어 하늘을 뒤덮는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남청(李嵐淸)은 ‘갑오전쟁의 실패를 영원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발분하여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고, 고난과 싸우면서 중화민국을 진흥시키자.’라는 글을 남겼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공도는 온갖 변화를 겪었지만, 그 가운데 진짜 굴욕적이었던 것은 20세기에 청일전쟁의 풍운에 휩쓸렸던 일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만들었던 현대식 해군이 전멸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하고 오로지 보수적인 대외정책만을 고수했던 청왕조가 무슨 생각으로 현대식 해군을 창설했을까?그 계기가 된 것은 청말에 발생한 태평천국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함대를 건조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기는 고사하고 90만냥에 해당하는 손해만 보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청조정은 직접 현대식 군함을 건조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홍장(李鴻章)은 강남제조총국을 세웠고, 좌종당(左宗棠)은 복주선정국을 세워 포선(炮船), 철갑선(鐵甲船), 어뢰쾌정(魚雷快艇) 등을 건조했다. 그러나 낙후된 기술로 만든 배는 작고 장비도 낙후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산 배치되어 각 성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고작 해안순시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근본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략하자, 청정부는 본격적인 해군의 확보에 대한 중요성과 긴박함을 깨닫고, 북양, 남양, 복건, 광서 등의 4개 해군을 창설했다. 1884년 8월 마미해전(馬尾海戰)에서 복건수군이 전멸하고 함대와 강을 방어하던 포대가 대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85년 2월에는 남양해군의 징경(澄慶)과 어원(馭遠)이라는 두 척의 전선은 프랑스함대에 의해 격침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발생하자 청정부는 당혹감에 빠졌다. 자기들의 악후된 기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정부는 자신들이 군함을 건조하는 방안과 외국으로부터 구매를 하는 방안을 겸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마련한 60여척의 군함 가운데 비교적 적재량과 마력이 큰 것을 북양해군에 우선적으로 배치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북양, 남양, 월양(粤洋-복건과 광동의 앞바다) 등 3개 방면에 해군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총리아문에서는 재정이 확보되지 못하여 일시에 세를 키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곳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우선 북양해군을 창성한 다음 점차 확충을 하여 3개 방면으로 분산하기로 결정했다. 청정부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먼저 당시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홍장을 파견하여 북양해군을 창설하도록 했다. 이홍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점차 북방의 각 성에서 지니고 있던 해군력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여 북양해군을 크게 키웠다. 그는 청정부로부터 전함의 구매하는 특권을 받아 선진전함을 북양해군에 우선적으로 배치했다.

1875년에서 1884년에 이르기까지 청정부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15척의전함을 사들였고 그 가운데 8척은 즉시 북양해군에 배치되었다. 이홍장은 전함을 빌린다는 명분을 앞세워 다른 해군부대로 배치될 전함도 자신이 차지해버렸다. 북양해군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1888년 9월 해군아문은 정식으로 《북양해군장정(北洋海軍章程)》을 마련하고 정여창을 북양해군제독으로, 임태증(林泰曾)을 좌익총병으로, 유보섬(劉步蟾)을 우익총병으로 임명하여 북양해군을 창설했다. 그들은 대소전함 25척을 보유하여 아시아 최고의 수군전력을 확보했다. 이들이 보유했던 전함은 영국과 독일로부터 구입한 것이었으므로 비교적 우수하여 당시의 세계적인 수준과 맞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독일에서 건조한 것으로 비교적 선진적인 성능을 보유한 거대한 철갑선이었다. 배수량은 7335톤, 6,000마력의 성능을 지난 이 전함에는 앞뒤로 150mm 함포를 각각 1문씩 탑재했으며, 구경 75mm 화포 4문, 기관총 10정, 어뢰발사관 3구, 어뢰정 2척을 탑재하여 막강한 화력을 지녔다. 이 전함이 배치되자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일본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제원(濟遠), 치원(致遠), 정원(靖遠), 경원(經遠), 내원(來遠) 등의 전함 5척은 모두 쾌속의 순양함으로 선체는 가벼웠지만 성능이 뛰어났으며, 초용(超勇)과 양위(揚威) 등의 2척도 쾌속의 순양함으로 구입할 때 서양의 선진무기를 탑재했다. 그러나 1888년 이후에는 북양함대도 다시는 전함 1척 대포 1문도 확충하지 못했다. 군비로 사용될 대량의 예산을 자희태후가 이화원(頤和園)을 짓는 용도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중국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국채를 발행하여 대규모로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1894년에 이르자 일본의 수군전력이 중국을 훨씬 추월하고 말았다.

해군기지는 해군의 전력에 중요한 부분이다. 북양해군은 왜 위해를 기지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홍장은 처음에 천진(天津)에 해군영무(海軍營務) 설치하여 해군학교를 개교하고 선창을 수축하여 함대를 천진에 정박시켰다. 그러나 북양해군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전함이 늘어나게 되자 수심이 얕고 부두가 좁은 천진항으로서는 감당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도와 지나치게 가까워 출격을 하기에 유리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서자, 이홍장은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여 1881년 친히 초용과 양위를 타고 여순항을 시찰했다. 그는 여순항이 해군기지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고 동항(東港)을 수축했다. 아울러 부두, 기기창, 화로창, 창고 등을 짓고 해안선을 따라 포대를 구축했다. 1880년에서 1890년까지 10년간의 공사를 한 끝에 드디어 여순기지가 준공되었다.

위해위가 북양수군의 기지로 건설된 것은 그보다 늦었다. 사실은 이홍장을 비롯한 군사전문가들은 일찍부터 위해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1881년 북양해군은 위해만에 전함을 정박시키기 시작했다. 1883년 이홍장은 후보도(候補道)와 유함방(劉含芳)에게 명을 내려 위해의 금선정(金線頂)에 어뢰고와 수군기계창을 짓게 했지만 예산부족으로 대규모의 건설을 하지 못했다. 1887년 청정부는 발해의 방어에 대해 전면적인 검토를 한 나머지 매년 백은 30만냥을 투자하여 위해와 대련에 본격적으로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대련과 함께 삼각방어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업은 1887년부터 시작되어 위해만의 주변과 유공도, 일도(日島)를 잇는 선에 포대를 설치했다. 또한 남북의 양쪽 입구를 지키는 동시에 육로를 지키기 위해 100여문의 각종 화포를 설치했다. 동시에 유공도에는 선착장과 부두, 수군기계창, 수군학당과 병원 등을 건설하자 위해는 갑자기 원동에서 가장 큰 군항으로 변했다. 해양방위에 대한 공정이 방대해지자 정여창은 유공도에 상주하게 되었고, 이홍장은 ‘위해위는 북양해군의 근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부두는 ‘丁’자 형으로 만들어졌다. 1889년에 시공하여 1891년에 준공되었다. 두꺼운 강철판으로 만든 기둥을 바닷속에 밀어 넣고 그 사이에 돌과 콘크리트를 부어서 만들었다. 이 부두의 길이는 205M이며 폭은 6.9M이고 주변의 수심은 7M이다. 윗면에는 궤도를 만들어 정박한 군함끼리 연락을 취할수 있도록 했다. 이 교량은 여러 차례의 수선을 거쳤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1년에 원래의 시설을 토대로 증축한 것이다.

북양해군제독서

수군제독아문이라고도 한다. 유공도 중앙에서 서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남향 건물이다. 벽돌을 쌓아 청나라식으로 지은단층 건물로서, 청의 광서 13년인 AD1887년에 시공했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3단계로 청(廳)과 당(堂)을 배열했으며, 주변은 담장을 쌓아 놓았다. 건축면적은 약 4,000평방M이며 총 면적은 17,000평방M이다. 중앙에 세운 대문에는 ‘해군공소(海軍公所)’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청의 북양해군 최고사령관 이홍장이 친히 쓴 글씨이다. 해군공소는 당시 북양해군의 사령부였다. 대문 밖에는 패방(牌坊)이 있고 그 위에는 ‘갑오전쟁기념관’이라는 7개의 글씨가 있다. 1994년 이곳을 방문한 강택민이 갑오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쓴 것이다.

제독서 대문 바깥에는 위풍당당하게 땅을 딛고 마주 서있는 돌사자상이 있다. 자금성의 대전 옆이나 이화원의 대문과 같은 중국의 고대건축에는 모두 이와 같은 사자상이 있다. 왼쪽의 돌사자는 숫사자로 보통 하나의 둥근 구형체를 밟고 있다. 강력한 권력으로 주변을 통치한다는 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암사자의 다리 아래에는 어린 사자가 있다. 자손들이 영원히 번영을 이룬다는 점을 상징하고 있다.

의사청(議事廳)

위엄을 갖추고 늘어선 제독부 건물은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청이 3단계로 배열되었다. 원래의 의사청이었던 맨 앞의 정청에는 나중에 중국과 일본의 갑오전쟁과 북양해군에 대한 사진을 진열해 놓았다. 동쪽의 배청(陪廳)에는 중일전쟁 대 사용했던 무기, 북장, 일용품 등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서쪽의 배청에는 청나라 말기 위해연안의 군비상황을 모래로 만든 축소모형이 있다.

이 모형을 보면 유공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위해만은 남북 양쪽 해안에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바다를 향해 용트림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유공도는 위해만 입구에 있는 여의주와 같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이러한 형상은 위해만이 흔히 군사적 용어에서 말하는 ‘한 장정이 지키고 있으면 만 명의 적도 들어오지 못하는(一夫當關, 萬夫莫開)’ 천험의 요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섬에 구축된 방어기지는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당시 위해만 주변에는 약 30개의 포대를 구축하고 100여문의 각종 화포를 설치했으며, 수뢰영(水雷營), 참호, 장벽 등을 설치하여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당시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이 기지는 독일이 설계했다. 그러나 영국인 테일러는 이 기지에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말했다.

- 내륙을 향하고 있는 남부 내륙에 있는 포대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 섬 안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 사정거리를 재면서 사격을 할 수가 없다.

- 조부취(皂埠嘴) 포대에서 동남쪽은 사격의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 용묘취(龍廟嘴) 포대는 항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항구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 일단 적의 침입을 받게 되어 사격을 하면 항구에 정박한 아군의 함대나 유공도에 맞을 염려가 있다.

이러한 결점은 위해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러한 점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연회청

두 번째 마당의 중청으로 당시 북양해군의 연회장이었지만, 지금은 북양해군을 이끌었던 정여창, 정세창, 유보섬 등 장군들의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894년 북양해군과 일본군의 결전을 앞두고 작전회의가 열렸다. 장군들은 먼 바다로 나가 이미 위해를 압박하고 있는 일본군과 마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장군은 출격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위해만을 중심으로 수비에 치중하자고 주장했다.

왼쪽에 있는 밀랍인형은 영화 ‘갑오풍운(甲午風雲)’에서 영화배우 이묵연(李黙然)이 열연했던 정세창이다. 정세창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따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결전을 펼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싸워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호응하여 나가서 싸우자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던 정여창의 밀랍인형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유공도 방어전에서 부하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지만 반란이 발생하자 유공도는 적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1895년 2월 12일 새벽 정여창은 유공도에서 자살했다.

정여창의 왼쪽에 있는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난 외국인은 독일인 한납근(漢納根)이다. 육군대위였던 그는 방어공정을 지휘했다. 1879년 독일군에서 퇴역한 그는 중국주재 독일공사관의 초빙을 받아 중국에 왔다. 천진에 머물던 그는 군사교관 겸 이홍장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위해에서 북양해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자 그는 북양해군함대의 총교습으로 임명되어 위해로 왔다. 당시에 육지의 남북해안, 유공도, 일도에 수축된 포대는 대부분 그가 설계한 것이다.

유공도에 있던 포대는 산중의 좁은 협곡에 있었으므로 포신이 드러나지 않아 쉽게 공격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북 해안에 설치된 포대는 앞으로 바다를 바라를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후방으로 돌아 볼 수는 없었다. 만약 적으로부터 배후를 공격받게 되면 포신이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매우 피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중에 중국해군의 장군들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게 되자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황해해전이 끝난 후 그는 청정부에 건의하여 훈련을 겸한 쾌속선과 쾌속전함을 구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예산부족과 다른 원인으로 그의 건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중청

중청은 서원에 있으며, 북양해군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북양해군의 고급장교를 역임한 정세창이 졸업한 복주선정학당(福州船政學堂)과 그가 영국을 유학을 했던 시절의 자료를 볼 수가 있으며, 제독에서 하급 장교에 이르기까지의 10단계 함대 계급과 편제도 볼 수가 있다. 함대의 펴제는 어뢰함대, 우익, 중군, 좌익, 후군, 훈련병영으로 나누었다. 주력인 좌익, 중군, 우익에는 2척의 철갑선과 7척의 순양함이 배치되었다. 기함은 정원이었으며, 후군에는 포함이 배치되었다.

후청

원래는 제사청이었으나 지금은 전함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양쪽으로 정원과 치원의 모형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정원함에는 바닷물을 담수로 바꾸는 시설이 있어서 하루에 200명이 마실 수 있는 식수를 걸러냈다. 가운데에는 1894년 9월 17일에 발발한 황해해전 당시의 양군의 대진모형이 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침략의 야욕을 품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첩을 파견하는 한편, 조선에서 동학농민기의가 일어난 것을 중국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의 전함은 중국에서 조선으로 군대를 싣고 가는 전함을 기습 공격했다. 광을함(廣乙艦)은 격침되고 조강함(操江艦)은 일본군에게 포획되었다. 8월 1일 중일 양국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자 갑오(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9월 17일 정여창은 북양함대를 이끌고 압록강 서안의 대동구(大東溝)로 진출하여 병력을 조선으로 운송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대록도(大鹿島)에 닻을 내렸다.

상오 11시 55분 일본군의 전함이 발견되자 정여창은 즉시 응전에 나섰다. 북양함대는 2열 횡대로 늘어서 시속 5리의 속도로 항진했다. 제1대는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이 맡았으며, 제2대는 치원(致遠)과 정원(靖遠)이 맡았고, 제3대는 내원(來遠)과 경원(經遠)이 맡았으며, 제4대는 제원(濟遠)과 광갑(廣甲)이 맡았고, 제5대는 초용(超勇)과 양위(揚威)가 맡았다. 정여창은 일본의 함대 12척이 맹렬하게 진격하는 것을 보고 대형을 의각안행소진(犄角雁行小陣)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함인 정원을 시속 7리의 속도로 전진시켰다. 정원을 중앙에 두고 우익은 진원, 내원, 계원(繼遠), 초용, 양위가, 좌익은 정원, 치원, 광갑, 제원이 배치되었다. 12시 50분 정원의 305mm 주포가 불을 뿜으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 참가한 중국의 전함은 10척, 일본의 전함은 12척이었다. 적재량으로는 중국군이 모두 31,366톤이었으며, 일본군은 40,849톤이었다. 중국전함의 평균속도는 시속 15,5리였으며, 일본전함의 평균속도는 16.4리였다. 특히 발사속도에서 일본전함이 중국전함을 훨씬 능가했다. 일본전함은 모두 각종 구경의 속사포 93문을 장착했지만 중국전함에는 그것이 하나도 없었다. 양군의 승패는 그것으로 판가름이 되었다. 일본함대는 ‘일자진(一字陣)’을 펼치며 빠른 속도로 북양해군의 ‘인자진(人字陣)’을 양단했다. 그들은 북양해군의 주력함인 정원과 진원을 피해 우익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초용과 양위는 구식 목조선박에 철갑을 입혔으므로 속도나 화력에서 다른 전함보다 훨씬 열세였다. 두 전함은 일본군의 포격을 받자마자 격침되고 말았다.

정원의 망대와 신호장치도 훼손되었으며 정여창이 부상을 입게 되자 북양함대는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 이 때 일본전함 비예(比睿)와 적성(赤城)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전투력을 잃고 말았다. 길야(吉野), 낭속(浪速), 송도(松島), 고간수(高干穗), 추진주(秋津洲) 등의 일본전함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일본함대는 빠른 속도로 북양해군의 인자진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치원함은 기함인 정원함을 보호하기 위해 대오를 이탈하여 적을 공격하다가 적함으로부터 포위되었으며 탄약이 떨어지자 함장 정세창은 최고속도로 일본의 선봉 길야함에 부딪쳤다.

길야함은 함포를 쏘면서 빠른 속도로 도주했다. 추격하던 치원함은 갈야함에서 발사한 어뢰에 명중되어 격침되고 말았다. 전함에 타고 있던 200명 가운데 27명만 구조되었다. 바다에 떨어진 정세창은 부하인 유세창이 구명대를 던져구하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의 애견도 주인의 머리카락을 물고 헤엄을 쳤지만 정세창은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치원함이 격침되자 제원함과 광갑함의 함장 방백겸(方佰謙)과 오경영(吳敬榮)은 전선을 이탈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제원함은 양위함과 부딪쳐 침몰했고, 광갑함은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경원함도 일본함대에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맞고 격침되었으며, 함장 임영승(林永升)은 전신에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경원함에 타고 있던 200명 가운데 16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오후 5시가 되자 일본의 기함 송도가 북양해군의 정원함의 포격을 받게 되자 일본함대도 지휘력과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북양함대는 여순에 정박하고 있던 포함과 어뢰정이 출격하자 갑자기 세력이 증대되었다. 지원함대가 나타나자 일본함대는 함포를 쏘면서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북양함대는 10여리를 추격하다가 회군했다. 이 전투는 4시간 40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북양해군은 5척의 전함과 800여명의 병력을 잃고 급격히 사기가 떨어졌다. 일본함대는 3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한 척의 전함도 잃지 않았다. 일본함대는 불과 3개월 후에 완전히 원상복구를 하고 전투력을 회복했다.

후청의 서배청에는 위해방어전을 소개하고 있다. 황해해전 이후 일본군은 여순을 점령했다.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명을 받아 수군과 육군이 서로 의지하면서 위해항을 지키며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일본군은 산동작전군단을 편성하고 25,000의 병력으로 1895년 1월 20일 새벽 영성만을 상륙했다.오후에 영성이 점령되자 그 소식을 들은 청군은 도주하고 말았다. 25일 일본군은 두 길로 군대를 나누어 위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청군의 일부가 다시 도주하고 말았다. 30일 일본군은 남방포대를 공격했다. 북방포대를 지키던 6영의 병력도 2월 1일이 되자 모두 흩어지고 16명만 남았다. 총병 대종건(戴宗騫)은 정여창이 유공도로 오라고 하자 음독자살했다. 일본군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북방포대를 점령했다. 이제 유공도는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었다.

2월 3일에서 2월 12일까지 일본군은 해안에서 유공도를 향해 포격을 퍼붓고, 어뢰정으로 정원(定遠), 정원(靖遠), 내원 등의 북양해군 주력함대를 격침시켰다. 7일 왕평(王平)은 어뢰정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도중에 혹은 피격되고 혹은 사로잡혔지만 왕평은 어뢰정을 타고 연태로 도주했다. 그는 유공도가 이미 함락되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지원에 나서기로 했던 청군은 그의 말을 믿고 철수했다. 유공도는 고립무원이 되어 탄약도 식량도 모두 떨어지자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양원(洋員) 마격록(馬格綠)과 부분군관(部分軍官) 우창병(牛昶昞) 등은 사병들을 선동하여 정여창에게 항복을 하자고 협박했다. 사태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정여창은 몇 차례 사람을 파견하여 진원함을 불태우려고 했지만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우창병에게 제독의 인수를 폐기하게 했다. 11일 밤 그는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유보섬, 양용림(楊用霖)과 육군통령 장문선(張文宣)도 그의 뒤를 따라 자살했다.

 

우창병 등의 군관과 양원들은 함게 제독인을 도용하여 정여창의 명의로 항복문서를 만들었다. 12일 새벽 광병호의 함장 정벽광(程壁光)은 진북포함에 백기를 꽂아 일본군의 기함인 송도함으로 보냈다. 14일 우창병과 일보군 사령관 이동우형(伊東佑亨)은 송도함에서 11개 조항의 ‘유공도항약(劉公島降約)’을 체결했다. 17일 일본군 연합함대가 항구로 들어와 항복을 받았다. 청군은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전함 11척과 엄청난 물자를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훈련함 강위함(康威艦)은 무장을 해제하고 정여창, 유보섬, 양용림, 대종건 등의 시신을 넣은 영구와 부분관병, 양원들은 유공도를 떠나 연태로 갔다. 이로서 북양해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동배청과 동상(東廂)에는 제원함과 청군, 일본군이 사용했던 총, 포탄, 북장 등의 유물이 있다. 제독서의 후면에는 80년대에 찾아낸 제원함의 전주포(前主炮)와 커다란 돛대가 있다.

정여창이 살던 곳

‘소정공부(小丁公府)’라고도 한다. 1889년에 지었으며 정여창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6년 동안 살았다. 청의 북양수군장정의 규정에 따르면 해군군관들 가운데 정여창만 가족들과 함께 섬에서 거주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 군관들은 함상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청군은 상하가 모두 대단히 부패해 있었으므로 군기가 엄정하게 확립되지 못했다. 정여창도 먼저 이러한 군대의 규정을 파괴했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정공부는 우람하고 면적도 넓지만 정여창은 많은 집들을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고 남는 집들을 부하의 가족들이 살도록 빌려주었다. 방백겸도 섬 곳곳에 집을 지었지만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돈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 일로 사이가 나빠졌다.

정청은 응접실로서 자료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복원했다. 지금은 정여창의 일생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정여창의 본적은 안휘성 소현(巢縣) 주랑중촌(注郞中村)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태평천국에 참가했으나, 나중에 주장이었던 정학계(程學啓) 와 함께 청에 항복하여 전공을 세우고 총병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상사였던 유명전(劉銘傳)곽 kf등이 생기자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7년 천진으로 고향의 선배인 이홍장을 찾아갔다가 영국으로 파견되어 해군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888년 북양해군이 창설되자 이홍장의 추천으로 제독에 임명되었다. 정여창이 유공도에서 자살하자 그의 관을 세 줄의 구리줄로 감아 장례를 치루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1910년에 되어서야 위해와 영성의 유지들과 관리들이 주청을 하여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가까스로 장례를 치룰 수가 있었다. 패전은 했지만 비겁하지 않았던 장군의 누명이 벗겨지고 이제는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늦었지만 다행이다.

유공도 포대

유공도에는 6곳에 청대의 포대가 있으며, 각종 구경의 고대 대포 58문이 남아 있다. 포대의 규모는 대단히 크고 엄중하게 시공되었으며 정교하고 실용적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 황도포대(黃島炮臺)

유공도 서쪽에 있는 황도에 설치되어 있다. 청의 광서 16년인 1890년에 건설되었으며, 구경 24Cm 평포(平炮) 4문, 속사포 3문, 구경 6Cm 행영포(行營炮) 2문이 설치되었으며, 지하로 통하는 260M의 길이 남아 있다. 포대와 지하도의 보존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 공소후포대(公所後炮臺)

유공도 해군 공소 뒤쪽에 설치되어 있다. 청의 광서 15년인 1889년에 건설되었으며, 구경 24Cm 지정포(地穽炮) 2문, 구경 7.5Cm 행영포 6문, 속사포 8문이 설치되었으며 24간의 병영이 있었다. 1987년에 다시 수리한 지정포대는 관광객을 위해 개방되었다.

- 기정산포대(旗頂山炮臺)

유공도의 초고봉인 기정산에 설치되어 있다. 청의 광서 16년인 1890년에 건설되었으며, 지하의 엄폐시설과 지상의 포대로 구분된다. 구경 25Cm 평사포 4문이 설치되었으며 5Km의 참호와 탄약고가 있다.

북양해군 철마두(鐵碼頭)

유공도 서남쪽에 있으며, 북양해군의 전함을 정박시키기 위해 청의 광서 15년인 1889년에 건설했다. 철마두의 돈대는 직경 45척, 길이 56장인 두꺼운 철판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진흙을 넣어 돌처럼 단단하게 응고시킨 다음 해저에 박았다. 1915년에 중건할 때 상부에 길이 205M, 폭 6.9M, 수심 7M의 다리를 놓았다. 1935년 철판이 부식되자 위해위관리공서는 중국해군, 지방의 유지, 영국해군과 연합하여 철마두수리공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철마두가 중건된 후 1만톤급의 선박이 정박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1953년 위해시정부는 부식된 철구조물을 제거하고 양질의 철강재로 중수를 시작했다. 1971년 원래의 기반시설에 현재의 ‘丁’형의 교량을 건설했다. 지금은 중국해군이 사용하고 있다.

 

위해공원

2000년 6월1일 정식 오픈한 위해 공원은 북쪽 쓰팡로에서 남쪽의 핑두로까지 위해만을 접하고 있으며 총 길이는 3,218.6m, 평균 폭은 144.3m로 녹지 조성, 조각, 건축물, 바다 등의 탁월한 조건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그림 같은 자연 친환경 도시를 구서 하였으며,

관광, 레저, 오락을 종합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이빈난로를 경계로 동서 양측의 공원 부지 면적은 46.5만 평방m이며 공원 중심에는

문화광장이 건설되어 있고, 불쪽부터 남쪽까지 4가지 주제로 조성된 하이야, 하이롄, 하이송, 하이후이 풍경구가 있다.

중심의 문화광장에 조성된 4개 풍경구에는 각각의 주제를 상징하는 조각품과 함께 간결하고 쾌적한 녹화를 조성해 놓았으며, 각종 식물들을 심어 시민들에게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과 노인들을 위한 운동 공간등과 같은 다양한 장소들이 마련되어 있다.

하이야 풍경구 : 부지면적이 6,100평방m 이며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노인들의 편안한 쉼터이기도 하다. 하이야 풍경구는 조각 작품외 분수, 모래밭, 놀이터, 물놀이장, 식물, 미궁 등이 있으며 껍질 모양으로 된 조각은 높이가 6m에 달하고 펭귄, 팽이치기 등과 같은 조각품은 바다의 아들이 번영하고 창성하고 있을을 표현하여 위해시의 지속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하이롄 풍경구: 면적은 3,800평방m로 동심결 조각 높이는 4m이다. 하이롄이라는 명칭은 산과 바다를 낀 위해시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고 바다에 취하여 미련을 갖게 된다는 말로 위해 시민들이 바다와 함께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하이송 풍경구: 면적은 4,500평방미터로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내리막을 형성하는 광장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으며 바닥은 파도의 물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바다가 즐겁게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주요 조각작품인 “그림중의 그림”은 높이 10m,길이 12.2 m로 이 조각 작품을 통하여 대자연과 바다, 공원과 사회를 연결시켜 바다가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을 키워 준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감사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위해 시민들이 공산당의 지도아래 바다를 개발하고 바다를 보호하면서 얻은 성과를 찬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이후이 풍경구: 면적2,306평방m,5개의 원형 광장으로 조성. 가장 큰 광장의 직경은 30m,조각 작품의 높이는 6미터로 추상적인 형태의 구성은 관광객들에게 현대화된 과학 기술을 느끼게 해준다. 다른 4개의 광장은 각각 20미터로 중국 고대의 천문대, 고대 지남침과 현대 항해컴퍼스 및 해양지도등을 조각 내용으로 하여 과학 기술이 해양 산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과학 기술은 현대문명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심 문화광장 : 공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 길이는 580m. 전체 광장이 바다를 향해 이어져 있으며 총 부지 면적은 6.7만 평방미터. 그중 광장 면적은 3.96만 평방미토, 녹화면적은 2.4만 평방미터를 차지. 중심문화광장은 ‘바다 혼’의 광장으로도 불리는데 “바다의 노래”라는 조각 작품은 높이 10.75m, 길이 27m로 바다의 거대함과 그 힘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위해시의 혼, 중화민족의 혼을 상징하고 있다.

버스노선 ; 10, 24,32,33

택시 : 기본요금 5위안

입장료 : 무료

 

위해 해변 구경

야시장 구경

 

 

8월12일(일)

성산두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해로 사람을 보냈다는 곳으로 제위기간 동안 2번이나 둘렀다는 곳으로 중국내에서 해를 가장 일찍 볼 수 있는 곳.

국가지정 관광지로 별 4개짜리인 곳으로 해변 풍경 외에도 자연 동물원도 있고 다 볼려면 7-8시간이 소요된다. (입장료만 75원 정도 꽤 비싸다. 패키지 이용시 200원이 넘는다)

 

위해시 영성구에 있는 성산두(成山頭)는 산동반도의 동쪽 끝자락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닷가와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세찬 파도가 부딪치며 일어나는 흰 물보라가 그야말로 장관인 해안가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8대 해안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바다와 육지가 인접한 지역 중 가장 동쪽으로 중국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어 "중국의 희망봉" 이라 불려왔다. 또한 한반도에서 직선거리로 362㎡로 중국으로 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다.

 

산동성 영성시 성산산맥 끝에 자리잡아 성산두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하늘 끝이라는 의미의 "천진두(天盡頭)"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 산인데, 출렁이는 파도가 수시로 절벽에 부딪치면서 무수한 흰 거품으로 흩어지는 아름다운 경치와 수려한 풍경으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동해에서 해 뜨는 것을 바라보면 모든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풍취가 뛰어난 명소다.

또한,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와 제를 올렸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태양신이 거주한다는 성산두는 중국 역대 황제들이 여러 차례 시찰했던 곳이다. 기원전 219년 여기에 들른 진시황이 동쪽 끝이라고 판단, 재상 이사에게 ‘천진두진동문(天盡頭秦東門)’ 이라는 글자를 남기도록 했다. 또한 ‘사기’에 의하면 주 무왕을 보좌해 천하를 평정한 강태공이 바로 이곳에서 태양신에게 절하고 일주사당을 세웠다고 하여 지금도 진교유적, 사교대, 시황묘와 이사의 친필 제사 "천진두진동문(天盡頭秦東門)"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 북방의 국토 제일 끝지역으로서 한국과 일본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직선거리는 94해리로 중국으로 거리상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중국대륙의 가장 동쪽 끝에 있어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어 옛날에는 "太阳启升的地方/제일 먼저 해가 떠오르는 지역", "中国的好望角/중국의 희망봉/"이라고 불렀다.

 

성산두는 해발이 200M이고 동서의 폭이 0.75KM, 남북의 길이가 1KM이며 면적은 2.5㎢ 이다.

성산두는 군사의 요충지로 삼국시기부터 수, 당, 명청이 이르기까지의 많은 싸움이 이 지역에서 있었다. 중외에 크게 이름난 청일 갑오해전도 여기에서 불과 10해리 밖에 안 되는 바다에서 있었으며 북양수사 애국장령 등세창 장군도 여기에서 희생되었다. 등세창의 영웅적인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광서황제는 특별히 영웅의 기념비를 만들어 "壯節"이라는 글로 영웅을 기념하였는데 이 등세창의 기념비는 지금 시황묘에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 산인데 출렁이는 파도가 무시로 절벽에 부딪치면서 무수한 흰 거품으로 흩어지는 아름다운 경치와 수려한 풍경으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동해에서 해뜨는 것을 바라보면 모든 세상근심이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풍취가 뛰어난 명소다. 1988년 국무원으로부터 "국가급 풍경명승구"로 지정되었는데 주요 볼거리로는“성산두” “해루도” “유샤원” 및 “야생동물 자연 보호구”와 사냥터 등이 있으며 진시황이 다녀갔다는 “시황사주”가 있다.

 

골프

 

[적산법화원]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적산법화원은 현 지역 불교 성지이자 서기 820년대 신라인 장보고가 건립한 것으로서 나·당·일 삼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일본국 고승인 “원인법사”가 여기에 와서 도를 닦아 한,중,일 3개국의 우의의 역사적 상징으로 되어있는 뜻 깊고 의미 있는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여기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적산 주위는 원래 온통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는데 적산신이 바다로 출항하는 배들을 보호하여 주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적산신에게 와서 평안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성당시기 신라사람 장보고가 용역에 응하여 무녕(지금의 서주)에 와서 군의 장령으로 있었는데 용감하게 작전을 하여 많은 당나라 장군들의 사랑을 받았다.

후에 신라로 귀국한 그는 청해진의 대사로 있으면서 당나라와 "해상 실크로드"를 열어 유명한 해상무역가로 되었다. 장보고는 적산신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해상무역의 번영을 기원하고 상인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견지에서 법화원을 설립하고 스님을 초청하여 불경을 읽게 하였다.

처음으로 초청된 명승은 천대종파의 스님으로 그가 읽었던 불교경전이 "법화경"이라 이곳을 "적산법화원"이라고 하였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 때 벌써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는데 많을 때 이곳에는 30여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비용은 장보고가 지출하였으며 많을 때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불경을 들으러 왔었다고 한다. 당 개성4년(839년) 6월에 일본의 명승인 원인법사 일행이 불경을 구하러 당나라에 왔었는데 이 적산법화원에서 2년 9개월간 체류하였었다. 현지의 관리들과 스님들의 도움으로 그는 당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순조롭게 불경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에 귀국하여 원인법사는 당나라 사람들의 정성 어린 관심을 잊을 수 없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썼는데 책은 적산법화원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에 적산법화원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원인법사의 제자들은 이를 기념하여 일본 교토에 "적산법화원"을 세웠다.

1987년 일본의 학술계의 지명인사가 적산에 와서 고찰, 답사를 하면서 영성시 인민정부 대외판공실의 도움으로 인민폐 200만 위안을 투자해 이곳을 중건했고, 중건사업을 하면서 중국 관련부처와 국제사회에서 투자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곳은 5,000평방미터의 부지에 건설되었는데, 건물은 모두 당나라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묘사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대웅보전은 이곳의 중요한 건축물로서 보전 안에는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정교한 석가모니의 소상이 자리하고 있다.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며 전국불교협회의 회장인 조박초(趙朴初) 선생이 직접 쓴 "대웅보전"이라는 글자가 걸려 있다.

법화원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적산명신 조각상은 크기도 크기이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서려있다. 적산명신을 받치고 있는 대웅전 안에는 9,999개의 금불상이 눈이 부실 정도 사방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북쪽에 있는 장보고 기념탑은 한민족회 회장 최민자 교수가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법화원 중앙 광장에서는 하루에 두차례 분수 쇼가 열리는데10여m 높이의 청동 불상을 향해 밑에서 커다란 물줄기들이 웅장한 음악에 맞춰 쏘아댄다. 한 번의 분수 쇼는 우리 돈 40만원 비용이 든다.

적산법화원에서는 석도항까지 4Km, 배로 청도, 대련에 갈 수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육로에서는 고속버스로 영성 시내, 위해, 연대, 청도, 북경에 갈 수도 있다.

위해공항까지 40Km, 항공편으로 북경, 제남, 관주 등에 갈 수 있다.

위해시에서 적산법화원까지 80Km, 2시간 거리. 버스터미널에서 아침06:00부터 15분에 한번씩 출발한다

 

 

[장보고 전시관]

 

2007년 4월 22일에 오픈한 장보고(张保皋) 전기관은 석도(石島) 적산(赤山) 풍경구에 위치하고 부지면적은 1.3만 평방미터이다. 대당추몽(大唐追梦), 무녕종군(武宁从军), 원정적산(缘定赤山), 청해부침(清海沉浮), 원유장(源远流长) 등 5개의 전시홀과 1개의 레저홀이 있다.

주로 장보고가 당조에서 무녕군에 들어가고, 적산 법화원을 건립, 해적을 소탕하며, 해상 무역 발전에 공헌한 역사를 전시하였다. 전시관내에는 8미터 높이의 장보고 동상이 있으며, 전시관 건축은 당조의 풍격을 따라 기세가 웅장하다.

 

제1 전시관 : 대당추몽(大唐追梦)

[소년 영웅]

전남 완도 인근의 섬 지방에서 호족의 아들로 태어난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바다와 같이 어울렸고, 수영과 달리기, 말 타기 등을 잘했으며 성격이 호탕하였다. 또한 무예를 좋아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유명한 소년 영웅으로 불리었다.

 

[당조문화의 신라에 대한 영향]

통일 후의 신라는 당조 문화를 광범위하게 흡수하여 8세기 중엽, 통일신라는 당조를 따라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당조의 법률제도 등을 채용했다. 서기848년만 하여도 당조에 유학 다녀온 학생만 100여명을 초과했으며, 신라 학자들은 한자(汉字)를 음표로 조선어의 조사를 표기하였고, 신라문화의 발전을 추진했다.

 

[입당배경(入唐背景)]

8세기말, 통일신라 귀족 세력간의 투쟁이 벌어지고, 조정이 느슨해지는 데다 빈번히 발생하는 자연재해에 따라 상당수의 신라인들은 당조로 이민하게 된다. 또한, 당시 통일신라의 조정에서 크게 출세하거나 세력을 떨칠 수 있는 사람들은 극 소수의 진골 왕족들이었으며, 당시 20세의 약관인 장보고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당나라로 넘어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제2 전시관:무녕종군(武宁从军)

 

[무녕군 간략]

당조 중기 이후, 각 번진(藩镇)의 반란과 지배력 약화로 재정은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조정은 병사를 파견하여 서주(徐州)에 주둔하고 서기 805년 원래의 서사호절도사(徐泗濠節度使)에서 무녕군절도사(武寧郡節度使)로 개칭하였다. 815년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이사도(李师道)가 여러 차례 서주(徐州)를 침범하였는데 장보고는 이 토벌전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무녕군 부절도사인 왕지흥(王智兴)은 절도사 최군(崔群)을 내쫓고 서주를 차지했다. 조정은 할 수 없이 왕지흥(王智兴)을 무녕군 절도사로 임명하고, 무녕군은 이기(李琦), 이정기(李正已) 가족 및 오원제(吴元济) 등의 반란을 평정한다.

 

[무녕종군]

당시의 등주(登州)와 양주(扬州)는 유명한 무역항으로 다수 신라인들이 이곳에 거주 하였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무녕군에서 병사로 있다가 이기(李琦)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가한 바 있다. 장보고와 정년(郑年)은 당시 신라인들의 무역선을 타고 무녕군에 가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정년의 무예가 출중하고 이기(李琦) 반란의 진압에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819년 이사도의 반란이 평정되면서 장보고와 정년은 무녕군소장(武宁军小将)의 벼슬을 하게 된다.

이사도 반란이 평정 된 후, 정년은 무녕군을 떠나고, 장보고는 적산(赤山)을 중심으로 무역업을 시작해 적산에 신라인들을 위하여 법화원(法华院)을 세웠다.

 

제3 전시관:원정적산(缘定赤山)

 

[법화원 건립 원인]

적산포(赤山浦)는 장보고의 주요 활동무대로 당조의 중요한 무역항이기도 하였다. 장보고는 무역 근거지를 이곳에 두었으며,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화원에 상주하는 승려는 40여명 정도였으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庄田)을 가지고 있었다. 법회 때에는 한번에 250여명이 참석한 경우도 있다.

 

법화원에는 식당, 객방, 침실이 마련되어 손님들을 접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고까지 가지고 있다. 장전(庄田)으로부터 수확한 곡식, 야채 등은 사내 승려들의 일상 소비로 사용되며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신라인들이 이곳에 모여 명절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4 전시관 : 청해부침(清海浮沉)

 

[청해진 건립]

황해와 서남 해안 일대에 출몰하던 노예상과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서기 828년 장보고는 흥덕왕으로부터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을 설치하였으며, 청해진 대사라는 직책을 맡았다. 장보고는 해상 국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동시에 조선업, 제조업 등을 시작했다.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주요 근거지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어 기반을 다졌으며, 중앙정계에서 귀족들간의 권력투쟁이 전개될 때 김우징(신무왕)을 도와 그를 왕위에 즉위 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기 838년 장보고는 이 공로로 감의군사(感义军使)라는 칭호를 수여 받고, 동시에 2천 가구의 식읍(食邑)도 하사 받았다.

 

[청해진의 전멸]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이 된 김우징(신무왕)은 황제의 보위에 오른 지 6개월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 하였다. 본래 이것은 신무왕이 군대를 빌린 대가로 장보고에게 약속한 사항이었고, 문성왕은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결국 중앙정계로 진출하려던 장보고의 꿈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며, 장보고는 이에 분개하여 845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당시의 통일신라정부는 그를 무력으로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염장이란 인물을 시켜서 846년에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그 뒤, 신라정부는 851년에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의 주민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교역활동은 마비상태에 빠졌고,장보고의 해상왕국도 종말을 맞이 하였다.

 

제5 전시관:원원유장(源远流长)

 

[장보고 기념탑 건립]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4년 7월 24일, 세계한민족연합회에서 세운 장보고 기념탑이 준공되었으며, 김영삼 전대통령의 친필휘호 “장보고 기념탑” 이라는 글자가 각인 되었다.

 

[법화원 중건]

법화원은 845년에 일어난 회창법난(会昌法难)에 훼손되었다. 1987년, 룽청현(荣成县)은 일본 천대종 3세 웬인(園仁)이 저술한 “입당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라 적산 법화원의 유적을 고증하여 1988년 7월에 중건하여 1989년 5월 1일 개막식을 가졌다.

 

[한중문화 및 무역왕래]

한중 수교 후, 위해시는 우월한 지리적 위치로 한국인들의 중국 투자, 교육, 관광지로 부상하였으며, 한국의 “후원(后花園)”으로 불리기도 한다. 적산 법화원은 한.중 양국민의 친선을 상징하는 장소로 한국인 관광객도 지속증가하고 있다.

 

8월13일(월)

 

청도 국제맥주축제 青岛国际啤酒节

 

"청도국제 맥주축제는 1991년 청도 건립 백 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맥주축제는 국가유관부위와 청도시 인민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며 유람, 문화, 체육, 무역이 일체로 융합한 국가급 대형 경축활동이다. 맥주축제의 전야제, 개막식, 맥주 품평회, 문화야회, 예술 순행, 문체오락, 술 마시기 대회, 여행휴한, 전람회, 폐막식 등 활동으로 조성되었다. 2000년부터 고정한 매년 8월 중하순에 2주 동안 개최한다. 명절기간에 전 성시는 생동감과 활력으로 차 넘친다. 점령지의 면적은 500 묘의 맥주성내는 더욱 미주가 향기를 피우고, 열정이 넘실거린다. 매년에 20여 개를 초과한 세계 지명한 맥주회사들이 이 명절을 참가하게 이끈다. 또 근 3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맥주축제는 이미 청도부터 산동 제일 영향을 가진 대형 축전 활동이며 청도 공인하고 추천한 명절 제일 상표이다. 지금, 맥주축제는 전수와 계승이 백 년인 맥주문화와 터뜨린 도시개성 특정방면은 대체할 수 없는 작용을 발휘한다. 문화층면에서도 청도는 사육제(카니발)의 분위기, 더욱 외국 관광객들의 여름여행지로 청도가 거듭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2007년 맥주성에 모여든 관광객은 206만 명에 달했고 소비된 맥주는 720톤이었으며, 훼이취엔광장(匯泉廣場)에 모여든 관광객은 134만 명에 달했고 소비된 맥주는 230톤으로 이번 맥주축제 기간 동안 청도에 모여든 관광객이 총 340만 명이고 총 950톤의 맥주가 소비됐다.

 

"청도와 세계와의 건배"라는 주제로 이미 국제화된 청도맥주축제는 뮌헨 지역의 맥주 제조상만이 참가할 수 있는 뮌헨맥주축제와 비교하자면 전 세계인이 참가할 수 있는 청도맥주축제가 더 국제화 되어있기 때문에, 이 축제에 대한 모든 참가자들의 기대는 더욱 크다.

 

축제 동안 산동 TV방송국과 타이완 둥선(東森)방송국은 서로 협력하여 아시아와 유럽, 미국 지역에 청도맥주축제를 동시에 방영하며, 중국 신랑(新浪) 사이트에서도 온라인 방송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아시아 맥주축제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청도 국제맥주성은 중국 국내외 관광객을 위한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네 개 언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관광 서비스 센터"를 설치함으로써, 축제에 참가하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매년 30여개 이상의 유명 맥주 브랜드가 선보이며, 그 중에는 세계 8위권의 맥주도 있었다고 한다.

 

선보인 많은 "서양" 맥주 중 독일산 맥주가 20개 종류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맥주성의 독일 맥주촌(邨)에서는 가장 유명한 쾰른, 뮌헨 지역의 맥주와 필스너 맥주를 대량 선보였고, 또한 매년 10월에 열리는 뮌헨맥주축제에서나 마실 수 있는 뤼벤 생맥주 등도 선 보이고 있다.

 

축제에서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맥주 마시기 대회에서 여러 고수들과 겨루거나, 맥주잔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사람들의 열기를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몇몇은 퍼레이드에 참가해 자신의 솜씨를 내보여 이국적인 풍경을 펼쳤고, 또 몇몇은 인터뷰 보도로 세계 각지에 아시아의 맥주축제를 알렸다.

 

청도국제맥주축제의 발전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현재의 규모와 내용을 봤을 때 뮌헨 맥주 축제와 견줄 만 하다. 청도국제맥주축제의 한 맥주성만 해도 36개 종류의 브랜드 맥주가 있고, 26,000㎡을 차지하는 각각 분위기가 다른 12곳의 맥주 바(bar)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매일 수십만 명이 맥주성에서 맥주를 마시며 즐기고, 만약 맥주축제의 지회장까지 합한다면 규모 면으로도 뮌휀맥주축제와 견줄 수 있다고 한다.

 

장소는 청도시 석노인국가여행휴가지 국제맥주성내와 청도시 회천광장에서 개최된다.

 

청도맥주박물관 青岛啤酒博物馆

 

"오랜 역사를 가진 진귀한 전장과 현대 설계의 청도 백주 박물관은 백 년의 청도맥주 기업문화로써 한가지 중요한 조성부분이 있다.

이 박물관은 청도 맥주의 역사개발역정, 깊고 두터운 문화가 상세한 내막, 선진적인 공예수로(물길), 술 맛을 보며 오락하고 쇼핑하는 것을 일체로 한 중국 최초의 맥주 박물관이다.

 

청도 맥주는 이미 백 년이 되었다. 청도 박물관은 2003년8월15일에 청도 백 년 축하 의식할 때 정식 개관하였다.

주소; 청도시 시북구 등주로 56호

전화; 83821169

 

도사가 마신던 샘물로 맥주 만들어

건축물 외에도 청도에는 독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00년 전 중국 땅에 발을 디딘 독일인에게 무엇이 가장 아쉬웠을까. 바로 맥주다. 맥주의 본고장에서 온 독일 해군장교들은 하얀 거품의 시원한 맥주 맛을 그리워했다. 본국에서 배로 운반해온 맥주로는 도저히 이들의 욕구를 채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칭다오 맥주(靑島酒·칭다오비지우)’다. 독일인은 본토의 맥주 제조기술을 그대로 가져와 1903년 ‘독일맥주회사’를 설립했다. 다행히 청도에는 물이 풍부했다. 특히 청도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노산(老山)의 광천수’는 맥주를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시 중심지와 40㎞ 정도 떨어져 있는 노산은 해발 1133m로, 1800㎞에 이르는 중국의 해안에 인접한 산 중 가장 높다. 특히 노산은 도교의 발원지로 노자(老子)의 사당이 있고 당나라 때부터 도원(道院)이 많이 지어진 곳이다. 도사들은 이 산에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도사(道士)들이 마시던 물로 맥주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일품이었겠는가.

이런 칭다오 맥주를 두고 중국인들의 ‘허풍’은 절정에 이른다.

 

“칭다오 맥주는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노산의 광천수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체에 유익한 광물질이 많고 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맥주를 홍보하는 웹사이트에서도 청도맥주는 ‘노산 광천수’로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청도 맥주 박물관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가오훙잉(高紅英)씨는 “손님 중에 청도 맥주를 마시고 간염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다”고 자랑을 했다. 역시 중국이다.

하지만 20여년 전부터 청도 맥주의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노산 광천수를 포기한 지 오래다. 지금은 그냥 지하수를 검사해 사용한다고 한다.

노산 샘물을 둘러싼 허풍만 잠시 접어둔다면 청도 맥주 맛은 일품이다. 마실 때 텁텁하지 않고 상큼하며 뒷맛이 깔끔하다. 고씨는 청도맥주 맛의 비결은 철저한 품질관리에 있다고 설명했다. “총공정사(수석 엔지니어) 1명과 10명의 공정사가 매일 오후 4시에 샘플링을 통해 맛을 검사합니다. 여기에서 걸리면 폐기처분합니다. 그리고 매일 품질검사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합니다. 그리고 제조기술은 당연히 비밀입니다.”

중국인은 독일이 남겨둔 외세침략의 유산인 청도맥주를 폐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벌이의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이 물러난 뒤 청도맥주는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1945년 국민당 정부가 인수하고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접수해 ‘국영 청도맥주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청도맥주의 주식 44%는 중국 정부, 27%는 버드와이저, 나머지는 우리사주 형태로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철저하게 자율경영을 보장한다.

 

맥주생산량, 중국이 세계1위

 

중국 내에서 청도 맥주의 위상은 우리나라 술 회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개방 열풍과 함께 홍콩증시에 최초로 상장한 중국 기업이 바로 청도맥주이다. 상하이 증시가 출범한 지 2년 만인 1993년 8월에 상하이 A증시에 상장했다. 청도 맥주는 2003년에는 중국 10대 브랜드에 포함되기도 했다. 주룽지 총리 역시 “저장(江)성 서호의 룽징차(茶)와 산동(山東)성 청도의 청도맥주가 중국의 2대 국가 브랜드”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에서 청도맥주의 비중은 높다.

현재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미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맥주 브랜드는 500여개에 달하지만 청도맥주는 중국 내 시장 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또한 미국에 가장 많이 수출되는 중국 맥주가 청도맥주다. 현재 세계 20여개국으로 수출되고 있고, 맥주의 본고장 기술로 만든 만큼 유럽에서도 인기다. 중국 어딜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맥주는 청도맥주가 유일하다. 2000년 이후 중국에는 90여개의 세계 맥주회사들이 13억 인구를 노리고 시장진입을 시도했지만 청도맥주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

생산 초기 청도맥주는 일부 귀족이나 독일인만 마실 수 있었던 귀한 술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술이 됐다. 한국에도 2001년부터 수입되기 시작해 맥주 전문점이나 고급 중국음식점에서는 청도맥주를 마실 수 있다. 1991년부터는 날씨가 무더운 8월 중 2주 동안 ‘청도맥주 축제’가 열린다. 세계 20여개 브랜드가 참여하고 100만여명이 이 축제를 즐긴다. 또 청도맥주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청도 맥주 박물관’은 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박물관에는 독일인이 공장을 세울 당시 사용했던 맥주 제조 기계가 전시돼 있다. 당시 사용했던 독일 지멘스(Simens)사의 모터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도 독일에 침략 받았던 역사는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장사꾼 중국인에게 아픈 역사보다는 당장의 돈벌이가 우선이다. 아픈 침략의 역사도 돈이 된다면 팔아먹겠다는 중국인의 상술을 확인한 곳이 바로 청도였다

 

청도 숙박

 

8월14일(화)

청도 관광

◈ 청도시 해저세계(UnderwaterWorld)

청도해저세계는 청도수족관과 산동 로신유한공사가 2.2억 인민폐를 공동 투자하여 설립되었으며, 아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수백종에 달하는 수만마리의 물고기가 어린이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해저관광과 해양과학교육을 목적으로 전국 제일을 창조하였으며, 청도 황금해안선에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관광 명소이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게 된다.

이 바다는 청도에서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경관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도 해저세계의 건축면적은 7300평방미터이며, 전반 공사는 뉴질랜드 해경 회사 에서 설계하였다.

설비는 대부분 미국, 독일, 일본, 뉴질랜드 등 국외의 유명한 회사에서 수입하였다.

중요한 부위도 국제 권위적인 기술업체에서 책임지고 공사 하고 성능 실험을 하였다.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은 해양생물 표본관, 각종 조개류, 어류, 갑각류 등의 표본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21M 크기의 흑고래 표본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실제 크기이며 박제품이다.

 

다양한 박제들을 관상하고 나면 살아 움직이는 어류관으로 이동할 수 있다.

 

작지만 사나운 눈빛이 오싹한 중국상어, 허밋크랩, 불가사리 등을 지나고 나면 80M 길이의 해저수도가 펼쳐진다. 이곳에 서 있게 되면 머리위로 지나다니는 망치 상어, 대형 가오리, 매스게임을 펼치는 듯한 물고기떼 등이 마치 물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특히 이 곳의 침몰된 보물선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 곳을 지나다 보면 배 위에서 바다 세계를 감상하는 듯한 복도가 나타나는데 살짝 움직이는 조작으로 배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전 10시30분, 오후 2시30분에 잠수부가 직접 상어에게 먹이를 나누어주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수만마리의 물고기를 만나고 나면 이어 세계 최대의 산호초관이 펼쳐진다.

높이 7.5M, 둘레 5M의 인공 산호초관에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하는 인공 산호초가 7M높이를 자랑하며 무지개 빛으로 주위의 물고기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 산호초 주위를 맴도는 물고기들은 대부분이 호화로운 색채로 치장을 한 열대어들이다.

수만마리의 물고기를 만나고 나면 이어 세계 최대의 산호초관이 펼쳐진다.

 

높이 7.5M, 둘레 5M의 인공 산호초관에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하는 인공 산호초가 7M높이를 자랑하며 무지개 빛으로 주위의 물고기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 산호초 주위를 맴도는 물고기들은 대부분이 호화로운 색채로 치장을 한 열대어들이다.

환상에스컬레이터 천장에 그려진 바다세계를 지나고 나면 어린이 학습관과 휴게실이 기다린다.

 

어린이 학습공간은 컴퓨터 모니터에 찍히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원하는 물고기의 설명과 함께 사진을 볼 수 있는 매우 간편한 조작으로 어류학습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휴게실에 앉아서 대형 스크린에 나타나는 해저세계를 만끽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된다.

다음에 나타나는 곳은 해양생물 특별관이다.

이 곳에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었던, 희귀한 어류들을 만날 수 있다.

 

길이 4M가 넘는 자이언트 스파이더,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대형 조개류, 바다의 신사 해마 등 눈요기가 충분할뿐더러 아이들의 현장체험으로는 그만이다.

해양생물 연구실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실험실이다.

이곳에서는 상어 알, 먼지처럼 헤엄치는 어린 해마 등을 관찰할 수 있으며, 해양생물교실에서 비디오 감상과 강의를 직접 경청할 수도 있다.

해양생물교실을 지나치면 담수어관이 자리잡고 있다.

담수어관에는 악어처럼 얕은 물에서도 생활할 수 있는 어류들이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위치에서 헤엄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담수어관을 지나면 갖가지 해양생물 표본으로 만들어진 기념품들을 만날 수 있다.

돌고래 풍선 같은 기념품은 저렴한 가격으로 아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좋은 기념품이 될 수 있겠다.

연락처:0532-8289-2187

주소: 중국 청도 래양로(莱阳路) 1호

입장료: 90원(RMB), 전구간 표-100원(RMB)

위해에서 숙박

 

8월15일(수)

위해 백화점

위해 저스코(jusco)

귀국

 

 

 

 

* 골프장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중국어 ***

 

골프장: 까얼푸 치우창 / 카트: 띠앤빙처. 치우처/ 캐디: 치우퉁

 

캐디 백: 치우빠오 (내 캐디백: 워더 치우빠오)/보스턴 백: 이푸 빠오

 

락커키: 꾸이즈 야오스/ 장갑: 쏘우타오/ 골프 공: 까얼푸 치우(ㄹ)

 

스코어카드: 지펀카/ 그늘집: 시아오마이띠앤/ 클럽하우스: 후이꾸안

 

웨지: 치에깐/ 벙커: 싸컹 /페어웨이: 치우따오 /러프: 창차오띠

 

오비: 짱아이./잠정구: 짠팅치여우 / 앞 깃발이야: 치깐치앤미앤.

 

중간 깃발이야: 치깐중지앤./ 뒷핀: 치깐 허우미앤/그린: 꼴인..

 

라이: 씨앤 . /오르막 : 쌍포. /내리막 : 시아오포 ./오른쪽: 요삐앤.

 

왼쪽: 조삐앤/ 그린 깃발 뽑아라 : 치깐 나 띠아오

 

100미터: 이바이 미/200야드: 양바이 마

 

거리를 물어 볼 때: 뚜어 사오미(미터일 때). 야드일 때는:뚜어 사오마

 

[기타]

굿샷: 하오치우 또는 피아오리양

이쁘다; 피아오리양

물: 수이.

맥주: 피지우

신용카드: 씬용카 .(카드로 계산할 수 있냐: 커이 싸아카마?)

 

드라이브; 이하오무

3.5우드: 싼하오무깐. 우 하오무깐 (짧게 이야기 할 때는 우하오무)

3-S 아이언; 싼하오티에깐

4(~9) 아이언; (1- 10까지 중국어 싼.쓰-짧게.우.리우.치.빠.지우.스---길게

쓰하오티에깐.......

피칭; 피깐

샌드; 에스깐

퍼터:투이깐

 

 

 

 

 

중국 위해 여행 일정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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