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23

오랜만에 나의 전공 관련 이야기 책을 읽었다.
예술가의 영역 중에서 음악가의 영역은 무언가 내 생각을 보태기가 조심스러웠다.
어설프게 건드리다 멈춘 내 삶의 한 영역인 것 같아서.
유튜브에서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연주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 적이 있다.
흑백 필름 속에 담겨진 호르비츠의 모습과 숨 죽인 객석 러시아인들의 교감은
이방인인 내가 느끼는 것 이상의 영역이 있었을 것이고 애환이 담겨 있었을 것이었지만,
그 영상을 본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아마 마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60 여 년 간 지속된 공산주의 체제 속에 지친 러시아인들에게 돌아온
노년의 초라한 모습의 피아니스트.
그가 61년 만에 고국의 무대에 오르며 앙코르로 연주한 곡은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독일어로 '꿈', '몽상')였다.
그 짧은 곡은 불안한 정세와 독재 속에서 자유를 그리며 버텨온 고국의 국민들에게
그 세월에 대한 보상처럼, 개혁의 시작을 여는 문을 두드리듯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거장과의 60면 만의 해후였다.
시대를 거스르며 자신의 삶을 음악에 투영한 피아니스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한 권의 책 속에 다 담겨져 있다.
Op, 즉 Opus 는 라틴어로 '작품'을 의미한다.
이 단어 속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많은 작곡가의 시간이 담겨져 있다.
유럽 각지의 언론에서 호평 받은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시선으로
그리고 그녀만의 해석으로 소통하는 이 책의 이야기는 어설프지만 내 대학 시절의 전공과
같은 영역이라 더 신나게 읽어나갔다.

물론 지금은 글을 쓰는 작가, 또는 교육자라는 직업이 더 어울리는
나의 현재의 위치가 맞물려 잊고 있었던 나 만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시간이었다.
리스트의 전설적인 곡 '사랑의 꿈'은 그가 겪은 사랑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꿈이라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 꿈을 영원히 잠들지 않는 노래로 남긴다면"
깨어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그 꿈을,
음표 하나 하나에 새겨 넣은 리스트의 그때 그 시간의 마음을
읽어내며 그 곡을 다시 들어보기도 했다.
예술이 정치적 갈등이나 민족주의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라벨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음악가들 사이에서 독일 음악을 연주 금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
'음악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술 철학으로 이에 저항했다.

"변화는 항상 이전 세대의 눈초리와 견제를 받으면서 일어나고,
도리어 그 반발을 자양분 삼아 발전한다"
예술이 모든 것의 목적이자 근원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는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젊음과 늙음, 외모, 직업, 재력과는 무관하다.
라흐마니노프는 고모의 딸 나타샤와 결혼을 했다.
슈만은 스승의 혹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딸 클라라와 결혼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영혼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자신의 영역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이해하고 삶을 같이 걸어가는 것!
그러한 연유로 음악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과 결혼하는 이들이
유독 많았던 것일까?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는 그의 나이 17세에 스승 케제라체를 만났다.
그녀에게 15번의 레슨을 받은 후 그녀에게 청혼했다.
21살 연상의 스승에게 말이다.
'랩소디 인 블루'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 거슈윈은 16세 때 어깨 너머 배운
화성학 하나로 출발해 음악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청년이었다.

훗날 성공 후 모리스 라벨에게 음악을 배우러 갔지만,
라벨은 그를 거절했다.
이때 라벨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
과연 위대한 예술가는 그냥 그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다.
라벨의 성품은 랄로의 비난에 지혜롭게 대응했던 일화로도 남아있다.
랄로는 라벨의 데뷔 시절 수십 년 간 그를 끈질기게 공격한 인물이다.
어느 날 랄로가 라벨에게
"당신은 재능은 있으나 드뷔시를 모방하느라 큰 빚을 졌으니,
이제는 베토벤을 모방하라" 는 독설을 퍼부었다.

라벨은 응답했다.
"프랑스 전통에 충실한 위대한 개성을 지닌 드뷔시를 나는 깊이 존경한다.
천재는 스스로의 법칙을 창조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존재다.
나는 드뷔시를 존경하지만, 나의 본성은 그와 다르다.
나는 항상 그의 상징주의와 반대되는 방향을 따라왔다."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입으로 듣는 피아니스트의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로울 수 없다.
그녀의 빛나는 연주 경력 만큼이나 그녀의 글이 이 책 속에서 빛난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오래도록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부드러운독재자 #op23 #조가람 #클래식 #클래식이야기 #피아니스트 #에세이
#고전 #음악 #위로 #독서 #독서모임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글쓰기 #책
#책추천 #고전음악 #클래식음악
'즐거운 체험 ·이벤트 > 도서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추천: 초록 감각/ 캐시 윌리스/김영사 (0) | 2025.04.16 |
|---|---|
| 책 추천: 각별한 실패/클라로 지음/ 을유문화사/에세이 (0) | 2025.04.14 |
| 책 추천: 스파클/최현진 장편소설/창비 (0) | 2025.04.05 |
| 책 추천: 기후 환경 처음 공부/안재정 지음/체인지업 (0) | 2025.04.02 |
| 책 추천: 당근이세요?/ 표명희 소설집, 창비 (0)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