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북부의 한 버려진 수도원(빌라 산 지롤라모)을 배경으로
4 명의 부서진 영혼들이 모여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책을 읽고 오랜 시간 감동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좋은 책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무게는 오래도록 그 책의 시선에 머물게 한다.
이른 새벽 동이 터 오를 무렵까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5일 정도 이 책을 잡고 있었는데 200페이지를 넘기면서 잠시도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힘들다.
솔직히 책의 첫 부분은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뒤죽박죽으로 얽혀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며 이야기의 연결을 이해하고 부터는 저자 '마이클 온다치'에 대한
존경심이 이루 말할 수 가 없다.
이런 방대한 공간의 서사를 다루는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은 부커상 수상작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에 해당된다는 의미가
이런 걸작에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4명의 주인공 중에서 21살 간호사 해나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 처음부터 왜? 라는 질문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화상을 입은 알마시를 끝까지 간호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소설의 말미에서 알게 되면서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사실 이전까지 그녀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에 대한 미안함보다 그녀의 헌신에 눈물이 났다.
해나의 아버지인 패트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전사했다.
그는 군대에서 복무하던 중 화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 아버지의 마지막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모두가 떠난 빌라에 그녀를 남겨두게 했다.

영국인 환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모두 그를 두고 떠났다.
해나에게 알마시를 간호하는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것을 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뒤늦은 속죄이자 헌신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다른 부대원들은 모두 이동하지만, 해나는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해나의 아버지인 패트릭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해나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가족 같은 존재였다.
친구인 패트릭이 세상을 떠났기에, 카라바조는 그의 딸인 해나를 안전하게
캐나다로 데려가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카라바조는 과거 정보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독일군에게 협력했던 스파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해나가 돌보고 있는 정체불명의 환자가 혹시 자신이 쫓던 그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한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화상을 입은 실제로는 헝가리의 백작인 알마시는
사랑하는 연인 캐서린의 시신을 수습하려 할 때 영국군이
그의 이름 때문에 스파이로 체포하면서 삶 자체가 꼬이기 시작했다.

특히 실존 인물인 라슬로 알마시 역시 헝가리 귀족이었으며,
실제로 사막 탐험가이자 고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작가 마이클 온다치는 이 실존 인물의 '국적을 넘나드는 방랑자'적 기질을 가져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국적 싸움 속에서 길을 잃은 비극적인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공병인 킵이 빌라를 떠난 결정적인 계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 소식이다.
그는 인도인으로서 영국군에 자원해 폭탄 제거반으로 복무하며 목숨을 걸고 서구의 문명을 지켜왔다.
그러나 원자폭탄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이 전쟁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의 감정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훨씬 복잡하고 비극적인 환멸과 각성에 가깝다.

킵은 서구 열강이 결코 유럽 내에서는 원자폭탄 같은 끔찍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갈색 피부'를 가진 아시아인들에게 망설임 없이 투하된 폭탄을 보며,
자신이 충성했던 서구 문명의 잔인함과 이중성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국가와 정체성, 그리고 전쟁이 파괴한 사랑을 시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소설 전체적인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 오래도록 마음 속에 여운으로 남는다.
전 세계를 휩쓴 전쟁이라는 거대한 서사에 휘말렸던 인물들의 삶을 어떻게 이렇게 환상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킵이 오래 시간이 지난 후 해나를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이 화면으로 다가와
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러있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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