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게도 봄

비가 온다.
반가운 비다.
밀양에서 산불이 났다는 뉴스 보도를 보면서
작년 경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을 집어삼켰던 화마의 기억이
스멀스멀 악몽으로 다시 떠올랐다.
얼마 전 작년 하동 옥종마을 산불 현장을 수기로 담아낸 책 한 권을 읽었다.
'얄궂게도 봄'
가오슝 한 달 살기 하러 가기 전 받았던 책인데
이제 겨우 숨을 돌리고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뉴스 보도로만 접했던 당시 현장의 상황이
현실로 다가와 가슴이 아려왔다.
누구도 그 현장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당시의 고통이 재현되는 느낌이었고
그때의 상황이 누구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는지
확연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봄이 오기도 전 다시 밀양에서 산불이 번지기 시작했다니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반가운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면 좋겠다.
밀양의 화마를 다 덮을 만큼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
이 책 '얄궂게도 봄'은
치열했던 하동 옥종 산불 10일 간의 기록을 담아낸 책이다.
봄이면 하동의 산과 들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들뜬 기분에 젖어있던 그곳
봄맞이 잔칫상에 불청객으로 나타난 산불은 검은 입으로 속절없이 산을 태우고 마을을 태웠다.

90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마을을 지켜왔던 두양리 은행나무가 불에 타 사라졌다.
귀주대첩의 영웅, 일제강점기의 역사,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본
생생한 증인이었던 900살의 고목도 불 앞에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불시착이 길어질수록 대피한 어르신들의 불편은 늘어갔다.
한 뙈기의 하늘이라도 더 그을리지 않게,
한 포기의 풀이라도 더 사라지지 않게 처절하게 불과 싸웠던 사람들은
하동의 공무원이었고, 소방관이었고, 주민들이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고
해가 떠 오르면 눈을 감았으며,
태양의 진한 열기에 붉은 잔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밥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솥을 지피던 순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냈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감동적인 순간이
모여 하동은 다시 봄의 희망을 꿈 꾸게 되었다.
서툰 칼질에 손을 베고, 뜨거운 김에 손가락이 데이면서도
국자를 놓지 않았던 이유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리라 믿었다는 한 공무원의 마음이
있었기에 하동은 현재도 여전히 아름다운 하동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봄을 온전히 보내야 여름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꽃이 피고 지고 다시 녹음을 드리우게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잿빛 하늘이라면 여름은 오지 않는다.
하동 산불 10일 간의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순간의 시간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모두가 조심하고 그 날의 현장을 잊지 않아야
우리는 온전한 봄을 맞이할 것이다.
비가 내린다.
곧 봄이 우리의 온기로 다가올 것이다.
올해는 무사히 모두 행복한 봄을 맞이하길 기원해 본다.
책을 내려 놓으며 그 치열했던 화마의 순간을 잊지 않기로 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순간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하동의 따뜻하고 행복한 봄 날을 함께 응원한다.

'즐거운 체험 ·이벤트 > 도서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추천: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0) | 2026.03.11 |
|---|---|
| 책 추천: 날씨와 인터뷰하는 법 (0) | 2026.03.05 |
| 책 추천: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0) | 2026.02.09 |
| 책 추천: 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곽재식 지음 (0) | 2026.01.22 |
| 책 추천: 신에 관하여_시몬 베유와의 대화/한병철 지음 (0) |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