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탈리아

유럽여행 63일째 (이탈리아 로마)2014년 1월 15일(수)

이쁜 비올라 2014. 1. 17. 01:11

 

 

로마  (Rome)

 

로마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  중부의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테베레강 하류에 면하며 주로 홍적대지로 이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민은 거의 시의 행정영역 안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시역을 넘어선 도시권의 발전은

별로 볼 수가 없는데, 로마시의 행정영역에는 해안의 리도디로마,

국제공항이 있는 피우미치노 및 아직 택지화가 진척되지 않고 로마 평원의 자취가 있는

 서부의 구릉지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의 중심부이며 또 로마가 기원한 티베리나섬 부근은 테베레강 하구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원래 로마는 지금의 로마 중심부에서 시작된

작은 도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세력을 넓히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터키를 넘어 중동 지역,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북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상관없이 좋은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는데, 당시 문명이 발달했던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문화는 물론,

이집트, 페르시아, 지중해 연안 나라들의 문화까지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드넓은 제국을 이룬 로마는 많은 국가와 민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실용적인 문화를 발전시켰고, 오늘날까지 건축에 많이 사용하는 콘크리트를 발견했고,

서양 법률의 틀도 대부분 로마법에서 가져왔으며,

로마 의학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바로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 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마인들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는데요

덕분에 2000년 전 로마 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나 생활 모습 등을 알 수 있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광장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 (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 뒷쪽면

 

로마의 4개 성당에 속하는 유명한 성당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바실리카 리베리아나’라고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352년 8월 5일 더운 여름날에 교황 리베리오는 꿈에

성모 마리아를 만나게 되는데, 성모 마리아는 눈이 내린 자리에

교회를 하나 지으라는 계시를 내린답니다.

 

 더운 여름에 눈이 올 리 만무하지만, 실제로 교황은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교회가 세워질 만한 곳에 하얗게 눈이 내린 것을 발견하였고,

그 자리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소성당의 제단 위에 이 ‘눈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부조로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전설 때문에 교회는 매년 8월 5일 하얀 꽃잎을 흩뿌리며

‘눈의 기적’을 경축한다고 합니다.

 

교황은 352년에 계시를 받았으나 실제로 성당의 기초를 세운 것은 431년이며,

  13세기에 개수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보수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들을

지니게 되었는데,  교회 내부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예배당과

지하 묘지에 자리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우뚝 솟아 있는 높이 75m의 로마네스크식 종루도 멋스러운데, 

오래된 기초 위에 1370~1378년 동안 개조한 것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뾰족탑은

 16세기에 만들어졌답니다.

 

 

오피오 언덕 ( Parco del Colle Oppio )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로 오피오 언덕에는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이었던

도무스 아우레아가 있답니다.

 

 

로마는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서 길 중간 중간에 있는 유적지는 이렇게

철조망을 쳐 놓는다고 합니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 Saint Peter in Chains )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 이라고도 하는데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교도소에 갇혔을 당시 그를 묶었던 쇠사슬 유물을 보관하려고

 432-440년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빈콜리(Vincoli)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감옥 투옥 당시 발목을 묶였던 사슬인데,

이 두 개의 쇠사슬을 다른 성자들이 투옥되었던 감옥에 보관하자

자기들끼리 스스로 얽혀 버렸다고 전해진답니다.

 

 따라서 이 사슬들을 따로 보관하기 위해 이 성당이 지어졌으며, 

 매년 8월 1일에는 쇠사슬과 함께 기념행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쇠사슬들은 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에 있는  성물함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당의 중앙 제대 오른편에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이 있는데,

2.35m의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교황 율리오 2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십계명을 받고 하산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던 백성을 향해 분노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성당 입장은 무료인데 아들이 이곳에 갔을때는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성당 입장이 안되어서 이렇게 성당 바깥쪽의 '모세'상 사진만 찍어 왔다고.......

 

 

콜로세움  (Colosseum)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72년에 착공되어 8년 동안의 기적적인 역사를 거쳐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준공된 콜로세움은 로마시대에 건립된

5 만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의 건축물입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라고 하는데,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 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답니다. 

 

 

글라디아토르의 시합과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고 하네요.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원주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으며,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Arch of Constantine )

 

이 개선문은 티투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더불어,

고전기 로마 시대부터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은 세 개의 로마 개선문에 속한답니다.

 

로마 황제들이 축하 행렬을 벌일 때 택했던 오래된 길인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서 있는 주요 유적으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라 알려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바로 외부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312)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서로마 제국의 단일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습니다.

높이 21m, 너비 25.7m, 두께 7.4m로 개선문의 아래쪽은 콘스탄티누스가

전리품들과 더불어 지나갔을 육중한 중앙 아치와 사이드 아치,

대리석으로 된 지지 교각, 코린트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티카 양식으로 된 꼭대기 부분은, 황제가 막센티우스와 벌인 전투와

그 승리를 표시하는 여러 장면, 인물, 글귀가 조각되어 있는

대리석 패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재치 있는 재활용을 보여 주는 매우 오래된 본보기라 할 수 있는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세워졌던 옛 기념물로부터

장식 부분을 떼어오거나 개조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재료가 재사용되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개선문에 나타나 있는 사건의 하나이기도 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뒤따라 급하게 제작하느라

그리 하였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콘스탄티누스를 많은 존경을 받았던

 초기 황제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을수도 있다고 합니다.

 

 1700년대에 대규모 복구 작업이 행해졌으며, 현대로 와서는 1990년대 후반에

상당한 양의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며, 2014년 1월 현재도 로마내의

유적지 절반 이상이 보수 중이라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콜로세움 바로 옆에 있답니다.

 

 

대전차 경기장 ( 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 )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움푹 파인 거대한 타원형 광장으로

고대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 이었습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에서 나와 뒤편으로 걸어가면 아주 널따란

벌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로마 귀족들이 열광하며 관람하던 전차 경기장.........

 

기원전 7세기 프리스쿠스 왕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거치면서 완성한 경기장은

25만 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만큼 규모가 컸습니다.

그 당시 로마 인구가 100만 명이었으니 대단한 경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이 끄는 2두 전차나 4두 전차가 '키루쿠스 막시무스' 라고 불리는 원형

대경기장을 달리는 광경은 당시로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한 경주에 모두 12대의 전차가 출전해 7바퀴를 도는데 엄청난 속도와

전차의 무게 때문에 커브에서는 종종 전복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전차 경주는 스포츠라기 보다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말과 전차를 타고 겨루는 전투로 1959년에 제작된 영화 '벤허'는 목숨을 걸고

달리는 로마시대 전차 경주를 실감나게 재현재 주고 있습니다.

 

 

 

진실의 입 ( Mouth of Truth )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으로, 지름은 1.5m 정도입니다.

기원전 4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으로, 이 조각상이 진실과 거짓을 심판하는

 '진실의 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진실의 입이 있는 보카델라베리타광장의 '보카'는 '입', '베리타'는 '진실'을

뜻하는 것으로 미루어 광장 이름도 진실의 입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가(街) 산타마리아델라교회 입구의 한쪽 벽면에 있으며,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입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로마시대에는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었다고도 하는데,

 중세 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사람을 심문할 때  심문을 받는 사람의 손을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데서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전해진답니다.

 

만약 진실을 말하더라도 심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손을 자르도록 미리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고 하네요

 

 A. 헵번(Audrey Hepburn)과 G. 펙(Gregory Peck)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로 유명해진 이래, 로마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샘에는

 등을 돌린 채 동전을 던져넣으면 로마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트레비분수가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서 그런지 '진실의 입'앞에서 사진을 찍기 전에

50센트를 내어야 하고 사진 찍는 것도 한장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데

마침 아들 차례에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교대를 하는 타임이라 교대 하는 순간을 이용하여

아들은 이 앞에서 찍은 사진을 10장 가량 저에게 보냈더라구요^^......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 Santa Maria in Cosmedin )

'진실의 입'이 있는 이 교회는 6세기에 고대 로마의 시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루는 12세기경에 만든 것입니다 

 

 

테베레 강의 팔라티노 다리입니다.

 

 

테베레 강에 있는 작은 섬 ( Isola Tiberina )

길이는 약 270m, 너비는 67m로 테베레강 남쪽 굽이의 한가운데에 있는

보트 형태의 섬으로, 테베레강에 위치한 유일한 섬입니다.

 

테베레섬에서 두 개의 다리로 로마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로마 시대 최고의 다리인 파브리키우스 다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케스티우스 다리가 있습니다.

고대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퍼지기 전에 중죄인들과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만

섬에 갇혔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피하는 곳이었으나 섬에 그리스 신화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세워지고 난 후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여러 신전이 세워졌으며 나중에 가톨릭에서 이곳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부수고 십자가가 달린 기둥으로 대체했습니다.

998년에는 오토 3세가 산 바르톨로메오 알리솔라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대교 성전인 시나고가 (Sinagoga)

 

유대 교회당(시나고가)이라고 합니다.

 

 

몬테 사벨로 (piazza monte savello)

 

 

 

마르켈루스 극장 ( Theatre of Marcellus )

역사지역인 산탄젤로 리오네 지역에 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당하기 전에

 짓기 시작하였고 BC 13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공하였으며

 BC 12년 공식적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자신의 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요절하자 그의 이름을 붙였답니다.

 

당시 연극이나 노래 공연이 열렸으며 한때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연장이자

 관광지였는데, 16세기에 오르시니 집안이 개축하여 주택으로 사용하였고

현재는 건물 상부를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름 111m, 높이 32.6m의 반원형 대형극장이었으며 본래 1만 1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소재는 주로 응회암을 사용하였고 아치·회랑·터널·

경사로들을 기초부와 중앙부를 그리스 양식인 도리아식·이오이아식의

기둥들로 장식하였습니다.

 

상부는 코린트식 기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세시대에 개축하여 확실하지는 않답니다.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

현재 로마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입니다.

 

 

시청사 앞의 조각상과  건물 양쪽으로부터 현관으로 이어진 계단도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것이라고 합니다.

시청사 뒤쪽 좌우에 설치된 테라스에서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들어 온답니다.

 

 

카피톨리니 박물관 (Capitoline Museums)

 

로마의 카피톨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에 함께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이 지역은 과거 로마시대의 중심지로 제우스 신전을 비롯하여

 25개의 신전이 있던 장소였답니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1536년 교황 시스토 4세 (Sixtus IV, 1414~1484)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가 설계하였는데, 미켈란젤로는 기하학적 무늬를 이용하여

 광장을 설계했고, 이는 주변의 건축물과 더불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공간미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서있고, 세나토리오 궁전,

 누오보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 개의 궁전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1471년 교황 시스토 4세는 로마 건국 신화의 상징인 몇몇 동상들을 옮겨다 놓았으며,

 누오보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에는 고대 로마시대의 훌륭한 조각 및

 회화작품이 나뉘어 소장되어 있습니다.

 

 두 건물은 지하통로를 통해 연결되며, 입장권으로 관람 가능하답니다.

콘세르바토리 궁전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시를 빼는 소년》,

《세례 요한》 등 고대로마시대의 조각과 동상들을 비롯하여

그리스, 이집트의 유물들을 관람 할 수 있으며. 누오보 궁전에도

《죽어가는 갈리아인》을 비롯한 《큐피트와 프시케》 등

고대 로마의 동상, 비문, 석관, 흉상, 모자이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생각하던 신전과 공회당 등

 공공 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입니다.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는 한때 원주민들이 수장 묘지로 사용하던 늪이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왕 타르퀴노 프리스코가 하수처리장을 시설하고

 이 늪을 메워버리자 공회장터 역시 매몰되었는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발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가축 방목지로 사용되었기에 '우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굴작업이 괄목할 정도로 진행된 다음 이 공회장은 엄청난 신전과 공공건물,

그리고 아치형 건물과 상점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건물들을 치장하고 있는 조각상들도 무수히 널려 있으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석상들 중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놓여 있는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의미는 대단하며,

  전체적으로는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동시대에 함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상세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렵답니다.

 

 

포로 로마노는 캄피돌리오의 원로원 청사 뒷면의 벼랑에서 바라보면

더 멋진 풍경으로 나타나는데, 그 벼랑은 타르페아 라는 어느 소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타르페아는 조국을 배반하고 사비니에게 성채를 넘겨주었는데,

훗날 그에 대한 죗값으로 벼랑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으며,

그 뒤로 타르페아 벼랑은 배반자들의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포로에는 중요한 신전 터 세 개가 있는데,  첫째로 368년에 보수작업이

끝난 열두 신들을 모시던 포르티쿠스 데오룸 콘센시움은 이교 문화의 마지막

반작용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둘째로는 베스파시아노 신전으로 티투스 황제 때 착공하여

도미치아누스 황제 때인 89년에 완공된 코린토 양식의 원주입니다.

셋째로는 기원전 367년에 건설되었던 화해의 신전이 있던 바닥이 남아 있는데,

 이 신전은 평민도 호민관이 될 수 있도록 한 피치니오 세스토 스톨로네 법안이

도입된 것을 기념해 세워졌으며, 이 법안의 도입으로 로마의 정치가 원로원과

 민중이 참여하는 체제(S.P.Q.R)로 바뀌었답니다.

 

 

벼랑에서 내려다보면 원주 여덟 개가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나라의 보물을 보관하던 사투르누스 신전의 잔해랍니다.

기원전 497년에 세워졌는데, 도리아풍의 원주는 4세기 때의 것이라 하며,

 사투르누스 신전 처마 밑으로 화산의 재단인 풀카날레라는 제철용 도가니가 있었는데,

사비나의 약탈 이후 사비나의 왕 티투스 타치오와 맺은 동맹을 기념하여

로물루스에게 헌정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회당과 세베리우스의 개선문 사이의 공터엔 정치집회를 하던 코미시움이 있었는데,

 여기엔 아직도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하던 정치인들의 연단이 있답니다.

 'Lapis Niger'라는 이 연단은 로물루스의 묘지 덮개였다고 하는데, 세베리우스의 개선문은

그의 아들들 제타와 카라칼라에 의해 203년에 헌정되었답니다.

두 형제는 우의가 두터웠으나 나중에는 권력다툼을 벌였고, 결국 카라칼라가 승리하여

헌정판에서 제타의 아름을 지워버렸으니,

권력이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속성을 가졌나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념물로는 'Basilica Giulia'라는 공회당을 들 수 있습니다.

 건축학적 특성이 풍부한 이 공회당은 로마인들의 삶에 아주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국가의 공공업무나 법률업무가 수행되었습니다.

이 공회당은 카이사르가 옛 셈푸로니아 공회당 터 위에 지었기에

그의 이름 'Julius(이탈리아어로는 Giulio)'를 따서 'Basilica Giulia'라고 부른답니다.

남아 있는 원주는 'Foro'에 부속된 건물로는 마지막 것으로 기원후 608년에 완공되어

비잔티움의 포카 황제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질로 호수에서 타르퀴니 왕국에 대한 승전소식을 맨 처음 전해주었다는

전설적인 인물들로서 트로이 헬레나의 형제들인 카스토레와 폴루체를

모시는 신전이 여기에 있었고, 그 옆에는 베스타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 모셔져 타오르는 불꽃은 나라와 가정에 필요한

불의 영원성을 상징하였답니다.

 

 

191년에 마지막으로 재건축된 이 신전의 폐허 뒤에는 신전을 지키던 처녀들의 숙소가 있었습니다.

처녀들은 신성한 불을 숭고하게 보전할 의무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 따른 권위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30년 동안 정숙을 지키며 업무에 충실하고 나서야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었다니......

 그 여인들은 한 서원을 파기하면 벽 안에 산 채로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베스타 신전 왼쪽에는 카이사르 제단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카이사르가 화장되었습니다.

그 옆에 있는 나지막한 단상에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로마인의 단결을 호소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들리는 것만 같으며, 포로의 저쪽 끝으로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모였던 안토니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고린트 양식의 원주로 서 있습니다.

 기원전 141년에 건축되어 나중에는 미란다의 성 로렌초 성당이라는 이름의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되었는데, 전면은 1602년에 건축되었습니다.

그 외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이 허물어진 장소에 중세기의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세워졌습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뿐만이 아니라 로마가 접촉했던 모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바꾸어왔습니다.

 

팔라티노, 캄피돌리오, 오늘날 대통령 궁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들이 만나는

 적당히 침하된 지역에 로마인들이 삶의 광장을 설립함으로써 이 세 언덕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모든 활동을 이곳에 집중하고 또 이곳에서 진행하였으니,

이곳은 곧 문화, 정치 및 공공 시민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린 문화의 터전에서 열띤 토론을 전개하고 원칙을 세우며 위대한 결정을 내리는

 역사의 초석을 로마인들은 성공적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도량형을 정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일까지 그들은 이곳에서 합의정신에 바탕을 두어

결정해나갔고, 손가락 열 개를 이용해 나타내는 숫자, 거리를 잴 때 보폭과

손바닥 넓이를 이용하는 방법, 재산의 양을 측정할 경우 가축,

 특히 양의 머리 숫자가 이용되었습니다.

 

 

 

라틴어의 'pecunia(돈)'라는 단어가 'pecora(양)'에서 파생된 것을 생각하면

로마인들의 지혜가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로마는 세력이 강해지면서 영토를 확장해갔고, 많은 이민족들을 지배하면서

그들에게 큰 변화를 주기도 했지만, 로마 자체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는 그 전체가 역사적인 도시이며  문화재 보호구역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선 돌멩이 하나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며,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가는 곳마다 보게 되는 유물들에 압도당하고 만답니다.

 

 

포로 로마노는 일직선인 사크라 거리(Via Sacra)를 따라 가면서

티투스 황제 개선문 -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 베스타 신전 - 원로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  순서로 돌아보면 된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동상

캄파돌리오 광장 한쪽에 있는 늑대 젖을 빨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동상

 

로물루스는 전설적 로마의 건립자이며 초대 왕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의 한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라티누스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는데,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다.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덕분애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가 마르스신(神)을 통해 낳은 쌍둥이  형제로,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때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어미가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으며, 딱따구리가 다른 먹을 것을

날아 주었다고 하는데, 쌍둥이 형제는 이렇게 늑대의 젖으로 자라다가

양치기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습니다.

 

그 후 형제는 협력하여 새로운 도시 로마를 건설하였으나(BC 753),

형제는 반목하여 로물루스는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동생 레무스를 죽였다고 합니다.

 

또 이웃인 사비니인과 싸웠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로는 로물루스는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두 민족을 지배하면서 30년 이상 왕으로 재위하며,

인구증가 ·판도확대, 제도(원로원)의 확립 등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로물루스의 건국전설은 BC 3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트리야누스 시장 (Mercati di Traiana )

 

11월 4일 거리(Via IV November) 근처에 위치한 트리야누스 시장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된

3층의 반원형 벽돌 건물로 포로 트라이아노의 일부입니다.

 

 

트리야누스 황제의 포럼에 설치한 시장에는 150개가 넘는 가게가 늘어서

고기, 생선, 채소, 향신료들을 팔았다고 합니다.

 

 

트라야누스 제의 포룸 ( Foro di Traiano , Forum Ulpium )

로마의 포로 로마노의 북쪽에 있는 황제 포룸 중 가장 크고 가장 최후의 것으로,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의 지도하에 A.D. 106년에 착수하여 113년에 완성했습니다.

 당초는 118x89m의 대광장, 그 입구에 개선문, 거대한 바실리카 울피아,

트라야누스제 기념원주와 두개의 도서관으로 되어 있고,

 광장의 측면에 위치한 시장은 종래는 포룸에 속한다고 여겼으나,

독립된 건물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트라야누스 원주 ( Colonna Traiana )

광장 중앙의 긴 탑 모양의 트라야누스 원주는

 포로 로마 북쪽의 베네치아 광장 구석의 트라야누스 포룸 유적지에 있습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도리아 양식의 기념비로,

 113년 완성하였는데, 원로원의 명에 따라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아폴로도루스가 감독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크기는 기단을 포함한 높이가 35m이고 탑신 높이가 30m, 탑신의 지름이 3.7m로,

 카라라산 대리석을 사용하였으며 탑신 내부에 1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습니다.

 

원주 표면 가득히 다키아 전쟁에 관해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부조로 표현하였는데,

총 길이가 190m에 이르는 부조가 탑신을 23회나 감아 올라갔답니다.

고대 동전에 담긴 내용에 의하면, 원주 꼭대기에 청동 독수리상을

설치하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트라야누스의 청동상을 놓았습니다.

 중세시대에 트라야누스의 청동상이 사라졌으며 1587년 12월 4일

교황 식스토 6세의 명으로 복원하면서 성 베드로의 청동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  Vittorio Emanuele Ⅱ Monument )

 

1885년 주제페 사코니가 설계하여 1911년 개관된 이 육중한 건물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축하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영광을 기리는 곳입니다.

 

비토리오는 1849년부터 1861년까지 피에몬테, 사보이아, 사르데냐 왕국의 왕이었으며,

 여러 해 동안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한 움직임을 이끌어 왔습니다.

1860년 그가 이탈리아 북부와 중앙 지역 대부분을 자신이 다스리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에

병합시키는 데 이르러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으며,

비토리오는 그 최초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앞부분에 있는 두 개의 원주 위에 숭고한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두 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하나는 '사색'을 또 하나는 '행동'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교황령과 두 시칠리아 왕국은 독립된 영토로 남아 있었습니다.

몇 년의 싸움이 더 이어진 다음에야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에서 손을 떼었고,

프랑스 군대가 마침내 로마에서 철수했으며,

1871년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되었습니다.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이탈리아 반도는 외국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 것입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기념관은

 로마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보이는데, 건물은 광대한 계단, 코린트 기둥,

분수,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조각상 두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토리오의 청동 조각상은 건장한 말에 올라타고 있고,

 건물 안에는 이탈리아 통일 박물관과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종종 지나치게 크고 잘난 척하는 인상을 준다고 조롱당하며,

 '웨딩 케이크'부터 '타이프라이터' 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별명으로 불려 왔습니다.

 

 

기념관을 지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일부와 중세풍 동네 하나가

 완전히 철거당했기 때문에, 처음 세워졌던 상황도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이탈리아 역사 속의 중요한 순간에 바치는 찬사이며,

 많은 관광객들을 이끌고 있으며, 무솔리니는 근처에 있는 베네치아 궁전을

 공식 거처로 삼았으며, 베네치아 광장을 내려다보는 발코니에서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기념물 발치의 양쪽에 두 개의 분수가 있는데, 이는 각각 이탈리아의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새겨진 식물들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승리를 뜻하는 종려나무,

힘을 나타내는 참나무, 가치와 승리로 얻어진 평화의 월계수, 희생을 상징하는 은매화

, 평화와 융화를 의미하는 올리브나무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베네치아 광장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습니다.

로마의 심장부에 위치해 로마의 주요 거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국경일(6월2일)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된답니다.

 

 

광장의 명칭은 바로 옆에 위치한 베네치아궁에서 기인하는데

베네치아궁은 피에트로 바르보 추기경이 자신의 저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으며,

 16세기 중엽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관으로 쓰였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광장 정면에 1911년 완공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기념관이 있고

근처에 포로 로마가  있으며, 로마 교통의 중심지이며,

영화 《시네마 천국》에도 잠시 등장했던 곳입니다.

 

 

캄피톨리오 광장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 계단(코르도나타)은

미켈란젤로가 착시현상을 이용해 설계한 완만한 경사의 계단으로

아래에서 바라볼 때 높은 계단이 좁아 보이지 않게 위로 갈수록 폭을 넓게 만들어

계단 전체가 직사각형처럼 보인답니다.

 

광장으로 들어서면 바로 양쪽에 1583년에 세운 대리석 조각품인

카스트로와 플룩스의 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광장을 기준으로 2개의 캄피톨리노 미술관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있습니다.

 

캄피톨리오 광장은 신성 로마제국 카를 5세의 로마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1583년에 설계하였는데, 투시법을 이용해 좌우 건물을 서로

비스듬히 배치해서인지 이 광장은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며,

또한 에워싸는 듯한 느낌을 준답니다.

바닥을 기하학적 무늬로 설계한 캄피톨리오 광장은 도시계획적인

측면에서 볼 때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시에나의 캄포 광장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광장들 주의 하나입니다.

 

캄피톨리오 광장에 들어서면 세나토리오 궁이 정면에 보이는데

좌우에 있는 계단을 통해 들어가면 되며, 계단 아랫부분을 보면 개선의

로마 여신상이 손에 큰 구슬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를 상징 합니다.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 (largo di torre argentina)

팍스 로마나 이후 포로 로마노 등이 자리잡기 이전 공화정 시대에는

4개의 신전이 있었고 아르젠티나가 정치의 중심지 였습니다.

 

 

이곳에는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4명의 여신을 모신 신전이 남북으로

늘어서 있는데 서쪽에는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었는데 현재는 아르젠티나 극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공화정파 원로원이었던 부르투스와 카시우스에 암살당한 폼페이우스 극장

계단이 있습니다.

 

 

피오리 광장  (캄포 데이 피오리 campo de fiori )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정사각형의 광장으로,

 이탈리아어로 '꽃의 들판'이라는 뜻이 있는데, 중세시대에 실제로 풀밭이었던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15세기 교황 시스토 4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중앙에는 1600년 2월에

이단죄로 화형에 처한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은 1887년에 건립되었고, 자신을 재판한 바티칸 방향을 향해 서 있습니다.

광장은 일요일과 국경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꽃 시장을 비롯해 재래시장이 서는 장소로, 다양한 먹을거리와 함께

로마의 전통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장 주변에는 레스토랑, 호텔, 꽃가게 및 각종 상점들이 즐비합니다.

 

 

나보나 광장의 '무어인의 분수(Fontana dei Moro)'

 

로마 중심가 코르소 거리와 테베레강 사이에 위치한 나보나 광장은

일년 내내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비는 로마의 명소입니다.

 마치 일년 내내 축제가 있는 것처럼 활기찬 나보나 광장은

원래 고대 로마의 경기장 유적이었던 곳을 경기장 트랙을 그대로 살려

 광장으로 조성하였는데 차량 통행이 금지돼 있고 주변에 노천카페가 많아,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는답니다.

 

나보나 광장의 명물은 3개의 분수로 포세이돈의 분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고, 무어인의 분수에는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인 무어인 동상이 서 있습니다.

나일・갠지스・다뉴브・라플라타강을 각각의 신 모습으로 형상화해 표현한

 4대 강의 분수는 베르니니의 실제 작품이랍니다.

 

모로분수(Fontana dei Moro)

 

무어인의 분수’라고도 부르는데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의 관람석 자리를 토대로 건설된

 나보나 광장의 남쪽 끝에 있습니다.

본래 1575년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돌고래와 4명의 반인반어(半人半魚) 해신인

 트라이톤 조각상을 만들었으며 피우미 분수를 조각한 조각가·건축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3년에 무어인 조각상을 추가하였습니다.

 

1874년 분수를 복원하는 공사 중에 원래의 조각상들을 보르게세 국립현대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는 로마 근교의 보르게세 공원으로로 이전하고

현재의 분수에는 복사품을 설치하였습니다.

소라껍데기 모양의 장미색 기부 위로 중앙에 무어인 또는 아프리카인이

돌고래와 싸우는 모습의 조각상이 서 있고 가장자리에는 4명의 트라이톤

조각상이 앉아 바깥쪽을 바라봅니다.

나보나 광장에는 모로 분수 외에 피우미 분수, 넵투누스 분수가 있습니다. 

 

 

4대강의 분수

당시 세상에 알려진 가장 긴 네 개의 강인 유럽의 다뉴브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아시아의 갠지스강, 남아메리카의 플라타강을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이 분수는

 17세기 이탈리아 화가이자 조각가요 건축가였던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그 건너편에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보로미니가 설계한 성 아녜제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마주 서 있습니다.

 

‘4대 강의 분수’는 언뜻 보기에 물 밖으로 치솟아 나오려는 불규칙한 피라미드 형태의

 바위산 형상을 하고 있는데, 마치 사면으로 뚫린 동굴처럼 여기저기

움푹 파인 분수 아래쪽에는 물을 찾아 기어 나오는 목마른 사자, 말,

악어가 보입니다.

 

분수의 중간 지점에는 4대 강을 상징하는 다이내믹한 네 명의 남성신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붙잡기 위해 막 일어나려는 듯

 아니 막 누우려는 듯, 누워있지도 서 있지도 않은 어정쩡한 중간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분수의 중앙 꼭대기에 곧추선 오벨리스크는 전체적으로 직선을 회피하는

 분수의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직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뾰족하게 뻗은 이 오벨리스크는 자신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소용돌이꼴 장식 위에서 왠지 불안해 보이는데,

분수에서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는 마치 산 속의 급류 또는 샘물처럼

 바위에서 솟아나 넘쳐흐르고, 물기둥과 폭포로 쏟아지면서 요란한 곡선을 그립니다.

 

 

트레비 분수 (Trevi Fountain)

중세기 로마인들은 물이 부족하여 고난을 많이 겪었는데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서야

교황들이 상수도를 보수하고, 또 새로 건설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로마인들이 멋진 분수를 만들었는데,

 폴리도리는 그 중에서 트레비 분수가 가장 돋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트레비 분수는 베르니니의 원안에 따랐다고 하는 니콜라 살비의 설계로

1730년에 시작하여 1762년에 완공되었으나

이 분수의 건설을 위한 초기 기획안이 수립된 지 2세기 후의 일이었습니다

트레비 분수에 가면 전 세계 동전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데,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석처럼 알려진 것이 등을 돌리고 서서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며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모습이 떠오르는 장소로도 유명하며,

 트레비 분수는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고대의 수도

 ‘처녀의 샘’을 부활시키기 위해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된 마지막 걸작으로서

바다의 신 넵튠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넵튠은 트리톤과 해마가 이끄는

조개껍질 위에 타고 있는데, 트리톤은 포세이돈의 아들로서 머리와 몸체는 사람이고

 아랫도리는 물고기 형체를 하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입니다.

 

해마는 두 마리인데, 하나는 길들여진 말로서 고요한 물을 상징하고

다른 하나는 야생의 말로서 요동치는 물을 나타낸답니다.

 건물 상단 부분에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은 4계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분수에 있는 물은 처녀의 샘에서 유래한것으로 로마의 한 처녀가

전쟁터에서 귀환한 목마른 병사들에게 이 처녀의 샘을 가리키고 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이 건물의 부조에 새겨져 있습니다.

 

트레비 분수는 특히 조명이 황홀하게 장치된 밤에 보면 더 환상적이라고 합니다^^


 

 

판테온 (Pantheon)

기원전 27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해서

7개 행성의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80년에 화재로 파손되었다가

118-12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609년에는 성모마리아와 모든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성당이 되었으며,

2,000년을 이어간 로마제국의 현존하는건축물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데

특히 이 건물의 청동문과 돔은 손상되지 않아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란 뜻으로

즉, 로마 전역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을 위해 세운 성전으로 로마인의

관용 정신을 상징한답니다.

판테온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반구는 우주를 상징하며, 거대한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은 행성의 중심인 '태양'을 상징한답니다.

둥근 천장에는 각 격자마다 청동 별들로 장식되어 있어 판테온 내부에서

'우주'를 느낄 수 있답니다.

지붕에는 금박을 입혀서 외부에서, 특히 주변의 언덕에서 멀리 봤을때 태양처럼

보이도록 하였으나, 17세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베르니니의 청동 기둥에 사용하기 위해 금박 200톤을 제거해 갔다고 합니다.

 

 

핀테온의 입구는 16개의 코린트식 화강암 원기둥으로 된 주랑 현관으로 되어 있어

건물 내부의 둥근 천장은 높이와 직경이 똑같이 43.30m로 완벽한 비율의 일치를 이뤄서

돔은 정확히 건물 내부 높이의 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바닥 쪽으로 원을 그려보면 정확한 구의 모양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렇듯 조화와 균형이 있는 건축미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랍니다.

 

1958년 파리 CNIT가 세워질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콘크리트 돔이었으며,

내부에 기둥은 전혀 없고 무거운 돔의 종량을 지탱하고 있는 벽이 유일한데

이 벽은 아치공법에 의해 만들어져 두터운 별제 안에 7개의 부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답니다.

이곳에는 로물루스, 주피터 신, 마르스, 카이사프 등의 석상이 있습니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부를 고르게 밝혀주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추는 가도가 변한다고 합니다.

마치 하늘이 판테온의 내부 공간에 스며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들게 해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산에 대한 경의를 환기 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판테온 내부에 들어서면 당시의 탁월한 건축 수준을 알 수 있답니다.

 

 

라파엘로는 1520년 사망하여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데 그의 무덤 위에

'돌의 성모마리아' 라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문하생 로렌세토의 작품입니다.

 

또한 판테온은 이탈리아 왕들의 영묘로 쓰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와 왕비 마르게르타의 무덤이 있습니다.

 

 

로마 건축 사상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판테온은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비례를 자랑하는 대표적 건물로 훗날 르네상스 시대의

원당 형식 건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광장 ( Piazza di Spagna )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배경이 스페인 광장으로

 바로 앞에 유명 쇼핑가인 콘도티 거리가 있고 코르소 거리 주변으로는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이 광장을 거쳐 갑니다.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17세기 교황청의 스페인 대사관이

이곳 주변에 있었기 때문인데 137개로 이뤄진 광장 계단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에게는 약속 장소로 애용되는 곳으로, 계단 바로 앞에는

‘난파선의 분수’라는 뜻의 ‘바르카치아 분수’가 자리해 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대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홍수 때 스페인 광장까지 떠내려온 배를 보고 착안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바르카치아 분수의 물은 깨끗해서 식수로 써도 아무 이상 없으며,

 로마에서 가장 맛있는 물로 유명하답니다.

 

 

콘도티 거리 ( Via di Condotti )

 

 

스페인 광장의 계단 앞으로 곧장 뻗은 거리로 들어서면 나오는 쇼핑가입니다.

 명품 브랜드 매장이 모여 있으며, 특히 여름과 겨울에 두 차례 열리는 세일 기간에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니다.

 

 

포폴로 광장 ( Piazza Popolo )

19세기에 건축가 주세페 발라디에르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이탈리아어로 ‘국민 광장’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장의 중심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18~19세기에는 이곳을 공개 처형 장소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교회(왼쪽 건축물)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포폴로 광장에 있습니다.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산타마리아 인 몬테산토 교회와 외관이 비슷하여

‘쌍둥이 교회’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설계나 구체적인 외관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으로 1675~1681년에 세워졌으며

추기경 지롤라모 가스탈디가 재정을 지원했는데, 원형 평면에

지롤라모 테오돌리가 지은 우아한 종탑과 8변형의 둥근 지붕이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치장 회반죽 장식으로 꾸몄고 카를로 폰타나가 만든

추기경 베네데토와 가스탈디의 기념비가 있으며, 높다란 제단에

성모마리아가 기적을 행하는 그림이 있고 오른쪽의 첫 번째 예배당은 베타람의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하였습니다.  

 

산타마리아 인 몬테산토 교회(오른쪽 건축물)

 

1662~1675년 카르멜회 교회가 있던 자리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으로

 새로운 건물을 세웠으며 추기경 지롤라모 가스탈디가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몬테산토는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 있는 카르멜산에서

이름이 유래한답니다.

 

본래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가 설계하였으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수정한 데 이어 

카를로 폰타나가 마무리하였습니다.

건물은 타원형 평면에 12각형의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18세기에 세운 종탑이 있습니다. 

 

 

 

로마 시내의 교통수단 중의 하나인 미니 버스입니다.

 

 

베네치아 광장 근처 식당에서 먹은 점심이랍니다.

 치킨 카레밥(10유로) +  피자(5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