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탈리아

유럽여행 64일째 (이탈리아 로마)2014년 1월 16일(목)

이쁜 비올라 2014. 1. 19. 00:31

 

2013년 10월 15일 해병대를 전역하고 11월 14일 65일간의

일정으로 유럽 12개국 배낭여행을 떠난 아들이 드디어 65일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이틀 뒤 토요일이면 우리집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겠죠......

 

그동안 아들과 나눈 카톡의 대화와 보이스톡을 통해서

 유럽 현재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던 아들의 65일간의 유럽 배낭

여행 포스팅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네요 ......

 

 

아들이 보내준 사진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그날 그날 아들이

유럽 현지를 밟아갔던 도시들의 흔적을 모아 정리하고

같이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서 저 또한 유럽이란 곳의 세상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아간 시간이었습니다.

 

언제나 시간이 나면 배낭을 꾸려 어디론가 떠났던 지난 시간들을

상기해 보면서 이제 제 뒤를 밟아 세상속으로 나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더 넓은 세상속에서 얻은 좋은 순간들, 기억들, 체험들을 바탕으로

우리 보다는 더 좋은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원해 보면서

항상 지금의 그 자리가 아닌 더 넓은 세상과의 소통을 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앞으로 지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아들의 65일간의 유럽 배낭 여행 이야기 64일째 로마에서의 마지막 포스팅 남겨봅니다......

 

 

 

테르미니 역  ( Stazione Centrale di Termini )
1942년 무솔리니의 지시에 의해 착공되어 중간에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0년에 완공되었는데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종착역'의 무대로 더욱 유명해진 곳입니다.

 

내부에 관광 안내소, 환전소, 은행, 우체국, 식당, 전화국 등 여행에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국제 관광 도시의 중앙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교통 : A/B선 Termini 역, 공화국 광장에서 도보 5분


 

 

테르미니 역 앞의 500인의 광장 ( (Piazza del Cinquecento) 입니다.

 

 광장의 이름은 1887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500명의 병사를

추모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 이 곳은 현재 로마 시에서 버스 터미널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500인의 광장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동상

 

 로마에서 가장 큰 기차역인 테르미니역 앞에 세워진 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은 

2011년 5월 동상이 세워졌을 당시

로마 시민들로 부터  "악인의 얼굴 같다"는 혹평으로 인해  얼굴을 새롭게 다듬는

'성형' 과정을 거쳐 2012년 11월 19일 재 공개 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바오로 2세 교황 동상은  조각가 올리비에로 라이날디가 약 5미터 크기로 제작,

 로마시의 관문에 해당하는 테르미니 역 앞에 세워졌는데,  시민들은

 "사랑받는 교황의 모습이 아니라 파시스트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를 보는 것 같다"며 비난했고

바티칸 교황청 측도 "요한 바오로 2세와 닮은 데가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이에 지아니 알레마노 로마 시장은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예술가, 문화재 담당자,

학자들을 소집해 동상 보수 공사를 진행했답니다.

현재, 성형 과정을 거쳐 공개된 교황의 얼굴은 입가의 미소과 부드러운 턱선이 강조됐으며,

 현지 언론들도 "교황의 얼굴이 훨씬 온화하게 바뀌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조각상을 제작한 라이날디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상을 오해하고 있다며

"나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닮은 작품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가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던 점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해명 했다고 하는데......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보는 시민들의 의도는 작가의 심오한

작품 세계를 이해 못했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있어서

보편적인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화인것 같습니다.

세상은 넓고 지구촌 구석 구석에서는 오늘도 많은 이슈들이 탄생하고

있지 않을가요 !!.......

 

 

공화국 광장  ( Piazza della Repubblica )

 

19세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욕장을 둘러싸고 있는 폐허가 된 건물터에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광장입니다.

 

그리스 . 로마 건축 스타일인 엑세드라 양식을 모방한 회랑이 있는 반원형 광장이라

엑세드라 광장 (exedra)이라 불렀으며, 광장 남쪽에는 오페라 극장이  있습니다.

 

 

이 광장 가운데에는 물의  님프 4명을 조각한 요정의 분수 (나이아디 분수)가 있는데,

당시에는 나체를 한 4명의 요정의 모습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분수는 본래 공화국 광장 바깥에 있던 분수로,

1870년 교황 비오 9세가 낙성식을 하였으며 당시에는 님프 조각상이 없었는데,  

1885년에 공화국 광장과 비아 나치오날레 거리(공화국 광장과 베네치아 광장 사이에 있는 대로)를

공사하면서 분수가 공화국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옮겨진 분수에는 알레산드로 궤리에리가 디자인한 네 개의 석고 사자상을 세웠는데,

이 사자상을 1901년에 마리오 루텔리가 지금 있는 님프 조각상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로마의 지하철 1회권 티켓입니다.

 

로마의 지하철인 메트로는 고대 로마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노선 확장을

하지 않아 현재 로마시내에는 3개의 노선(A, B, B1)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메트로는 A,B 2개의 노선으로 오전 05:30분 부터

23:30분 까지 운행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로마의 지하철은 서울의 출퇴근시의 지하철 안 보다 10배는

더 복잡하다고 합니다.

지하철 노선이 몇개 없다 보니 지하철에는 항상 사람들이 몸을 움직일 틈도 없이

빽빽한 사람들로 가득찬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로마의 지하철에서는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 사건이 난무하다고 하네요

 

요즈음 유럽의 몇 몇 도시들이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로

악평을 받고 있는데요 65일간의 여행을 다녀본 아들의 경험으로는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부근과 마르세유,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와 로마가

여행자들의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들 때문에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티칸 시국 (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

 

이탈리아 로마 안에 있는 도시 국가로 로마 교황을 원수로 하는, 

전체 면적이 0.44㎢, 인구가 1000여 명 정도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자,

1929년 라테란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안도라, 산마리노와 함께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바티칸(Vatican) 하면 우리는 로마 교황청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성스러운 나라에서 선거가 행해지는 경우는 교황을 선출할 때가 유일하며,

 다양한 산업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니

역시 특수한 국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활발한 산업이 있으니 바로 인쇄업입니다.

이곳의 인쇄소는 세계 거의 모든 언어를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 외에도 독자적인 은행, 우체국, 방송국 등도 갖추고 있는데 군대는

스위스인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전통적으로 담당하며

병력은 100명을 웃돌 정도라고 합니다.

로마 시내 티베레 강 서안에 위치한 바티칸 시국은 면적이 0.44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며,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성베드로 대성당이니, 교황의 교회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 전 세계 천주교도와 일반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곳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음울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답니다.

1870년 9월 16일, 이전의 수많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 과정에서 시도된

로마 교황령의 정복이 드디어 이루어지는데, 수많은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인물들이 카부르, 마치니, 가리발디 등으로,

 이때 일어난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특별히 리소르지멘토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부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리소르지멘토는 착착 진행되어 드디어 1861년 교황령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토리노에서 제1회 이탈리아 국회가

 개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탈리아 정부의 공격을 받은 로마 또한 이탈리아에 병합되고,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의 권위에 저항하는 자는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했으나

아무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10월 2일 주민투표에서 로마 교황령의 이탈리아 병합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피우스 9세는 궁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합에 항거했고

이탈리아 정부도 모른 척하며 수도를 로마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었는데,
그런 불편한 관계는 약 30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 어정쩡한 관계를 복원시킨 것은

바로 파시즘의 창시자 무솔리니 였습니다.

 

다양한 정치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권력을 쟁취한 무솔리니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교도의 구심점인 교황과의 관계 복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또한 수십 년간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던 교황청에서는

 새로 교황에 오른 비오 11세가 세상을 향한 일보를 내딛기 위해 결단을 내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세력의 화해 분위기는 조성되었고 무솔리니는 초등교육에서의

 종교 교육 부활, 성직자의 병역 면제 등 교황청이 기뻐할 처우 개선을 추진함으로써

노골적인 친근감을 드러냈고 교황 또한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1929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무솔리니와 교황청 특사

가스파리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라테란 조약의 주요 사항은 우선 교황청은 이탈리아 국가를 정식 승인했고

로마를 수도로 인정했으며, 반면에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티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였고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했습니다.

 

 교사 임면권은 주교들이 소유하게 되었고 결혼 또한 교회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탈리아는 과거 교황령을 인수받는 조건으로 17억 5000만 리라를 교황청에게 지불하였으니

 이 자금은 오늘날까지도 바티칸의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교황은 “아마 이런 사람이 필요했던 듯하다.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그와의 만남을 허락한 것이다.”라는 말로 무솔리니를 수용했고,

이는 무솔리니 진영의 선전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수단이 되었습니다.


한편 라테란 조약은 1984년 새로운 협약으로 대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로마가톨릭교는

 이탈리아 국교의 지위에서 물러났으며 공립학교의 종교 교육 또한 중단되었고

교회의 면세 등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바티칸 시국이 그대로 존속되는 데 반해

이탈리아는 현대 국가의 개념에 따라 종교적 색채를 벗게 된 것입니다.

 

 

 성 베드로 광장  ( Piazza San Pietro )

 

산피에트로광장이라고도 하며, 이탈리아 바로크양식의 거장인 화가·조각가 베르니니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습니다.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꼴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룬답니다.

 

좌우 너비는 240m로 정면 끝은 산피에트로대성당의 입구에 해당하며,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의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으며, 테라스  위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둥근꼴 기둥의 회랑은  온 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로 안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하며, 3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광장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주일 정오에 교황의 축복을 받으려고 이곳에 모인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입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오벨리스크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뒤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 가문의 문장과 십자가가 장식되었는데,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약탈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인식될 만큼 많은 굴곡을 겪은 건축물입니다.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

 

 

 오벨리스크 좌우에는 카를로 마데르나와 카를로 폰타나가 각각 만든

 2개의 아름다운 분수가 있습니다.

 

 

박물관 입장료와 우표 발행 등으로 바티칸 시티의 재정을 유지하고 있는

바티칸 시국 내의 노란색의 우체통

성 베드로 광장의 오른쪽과 왼편에  바티칸 시국 자체 우체국도 있으며

이곳에서 우표를 발행하고 미리 써간 편지도 붙일 수 있답니다.

이곳에서 발행한 우표를 붙여서 노란색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전 세계로 편지가 배달된답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 ( San Pietro Basilica )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도 하며,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산피에트로 대성당 관리 성성(聖省)의 관리하에 있으며, 그 역사는 깊어서 기

원으로 말하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습니다.

15세기에 한 번 시도 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D.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는데,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플랜의 중심에 대원개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바르다살레 베르레의 손을 거쳐 A.P.da 상갈로에게로 넘어갔고,

 그도 또한 궁륭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니,

그동안 역대의 건축 담당자들이 이 조영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습니다.

 

 

성당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고,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볼타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17세기 초기 신랑의 전면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헌당식은 1622년에 거행되었습니다.

 

 

피에타 ( Pieta )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을 보면 두꺼운 크리스탈 유리로 보호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하는데,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고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으며,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습니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현재는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습니다.

 

 

성 베드로의 청동좌상

 

13세기 플로렌스(피렌체) 출신의 조각가 아르놀포디 캄비오의 작품으로,

산 피에트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있는 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중세부터 이곳을 다녀간 신도들이 베드로의 발에 입맞춤을 해서

오른쪽 발가락이 거의 다 닳아 버렸다고 합니다.

현재 이 베드로 좌상 옆에서 지키는 사람이 있어 좌상의 발을 못 만지게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천개 /청동 기둥)

 

베르니니 최고의 걸작품으로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함께 르네상스, 바로크의 양대 예술 작품 중 최고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4개의 나선형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올리브 가지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위의 덮개에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있는데 바르베리니 가문의 많은 업적을

표현하는 인장인 장식술과 부지런한 벌(bee)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내부에는 황금으로 도금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한마리가 있고, 천개는

중앙대제대를 덮고 있는데 교황만이 이 제대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운데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위쪽은 천사 4명이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으며,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교화의 상징인 삼중관과 열쇠, 칼, 복음서를 들고 있습니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 아래의 지하 무덤에는 성 베드로의 묘소가 있습니다.

 

 

교황제대와 성 베드로의 옥좌

 

성당의 가장 깊은 곳에 베르니니가 금동으로 만든 거대한 옥좌가 있고,

 그 주변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암브로시우스 등 성인들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당 뒷면 가장 높은 곳에 원형 창문이 있고,

창 위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리창이 아니고 대리석을 갈아 만든 창이라고 하는데  밖에서 스며드는 태양광선의 빛이

대리석 창을 더욱 신비스럽고 은은하게 그 운치를 더해 준답니다.


 

 

 그레고리 7세 교황 기념비

조각상 아래 물결치는 듯한 카펫 모양의 조각이 실제 천 조각처런 보인다고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입장하기 전에 복장과 보안 검사가 엄격하다고 합니다.

반바지나, 미니스커트, 민소매 상의를 입고서는 입장할 수 없고, 가방안의

소지품 검사도 철저하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중앙 문 ( Grande Portale Centrale )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3개의 청동문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 문은 옛 성당의 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1455년에 아베를리노가 제작한 이 문 위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베드로와 바올로 성인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중앙 문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스러운 문 ( Porta Santa )

오른쪽에 있는 성스러운 문은 25년마다 오는 성년에만 열리는

문이라고 합니다.

 

  성년이 되는 해에 일 년 동안 열리는데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문에는

 16편의 성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으며, 또 같은 해에 제작된 '성사의 문' 역시 성년을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교황만이 이용할 수 있는 문이라고 합니다.

 

 

성 베드로 성당 입구의 베드로 동상

 

성베드로 성당 입구 양쪽에는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동상이 양쪽으로 있답니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Via della Conciliazione)

 

'화해의 길' 이라는 뜻으로 보르고 거리에 있는 도로이며, 길이는 대략 500m로,

 테베레 강의 서쪽 강변을 따라

성 베드로 광장과 산탄젤로 성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1936년에서 1950년에 걸쳐 건설하였으며,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가는 주요 통로입니다.

1929년에 바티칸과 이탈리아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1937년 착공하여

 1950년 성년을 맞아 개통되었습니다.

화해의 길 양편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줄지어 있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예술가 베르니니가 설계한 성 베드로 광장이 있습니다.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광장임에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기에, 여기에 들어서는 순간 그 황홀함에 취한다고 하네요

 

 

 

바티간 시국의 스위스 근위병

 

바티칸 시티에 있는 군대는 스위스인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전통적으로 담당하며

병력은 100명을 웃돌 정도라고 합니다.

 

 

바티칸 미술관 ( Musei Vaticani )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입니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율리우스 2세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입니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 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립니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 《여호수아기》,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 ·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입장료는 일반 16유로, 학생 8유로라고 합니다.

 

 

바티칸 미술관 안의 '바티칸 시국 모형도'

 

 

벨베데레의 토르소 ( Torso Belvedere )

 

뮤즈 여신들의 전시실 중아에 전시되어 있는 머리와 사지가 없는 흉상

 

 

 

 

 

 

 

 

 

 

 

 

 

 

 

라파엘로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

 

 

 

서명의 방 아테네의 학당

 

 

성찬과 세례에 대한 토론

 

 

보르고의 화재의 방

 

 

 

 

 

시스티나 예배당 들어가는 계단 위에 있는 천장화

 

 

최후의 심판

 

 

 

 

천지 창조

 

 

 

 

 

 

 

 

 

square garden

 

 

피냐 정원 (Pigna Courtyard)

벨베데레 정원과 함께 붙어 있던 바티칸 궁정의 일부로 정원을 가로질러

바티칸 도서관 건물이 세워지면서 둘로 나뉘었으며, 높은 곳에 있는 정원이

피냐 정원으로 정면에 있는 '솔방울 상' 장식물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피냐 정원의 또 하나의 명물은 구리 지구본으로,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념하여 제작된

구리 지구본은 오염되고 멸망되는 지구를 형상화한 현대적인 조형물로서

'지구 안의 지구' 라는 이름으로 포모도로가 제작했습니다.

 

 

피냐 정원 (Pigna Courtyard)의 '솔방울 상'

 

피냐 공원 정면에 있는 '솔방울 상'은 4m 가량으로 원래는 판테온 부근에 있던

로마 시대 분수대 장식이었으나, 중세에 성 베드로 성당의 정원으로

옮겨왔고, 1608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방울 양쪽 측면에는 '청동 공작 상'이 서 있는데,

이 작품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의 장식을 카피한 모조품으로 원본은

브라치오 누오보 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