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탈리아

유럽여행 60일째 (이탈리아 피렌체)2014년 1월 12일(일)

이쁜 비올라 2014. 1. 13. 21:40

2014년 1월 12일 일요일 아들과 인수는

베네치아 메스트레 역에서 오전 9시 29분 기차를 타고 낮 12시17분에

피렌체의 리프레디 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피렌체에서의 숙소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베네치아 메스트레 역에서 피렌체의 리프레디 역까지 오는 티켓이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까지 가는 비용 보다 절반 가량 저렴해서

리프레디 역까지 오는 티켓을 끊었다고 합니다.

 

피렌체 리프레디 역에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까지는  기차로 6분 거리라고 하네요.......

알뜰한 여행을 위해선 정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피렌체

 

“피렌체에서 깨어나는 일, 햇살 비쳐 드는 객실에서 눈을 뜨는 일은 유쾌했다. (중략)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 익숙하지 않은 걸쇠를 푸는 일도,

햇빛 속으로 몸을 내밀고 맞은편의 아름다운 언덕과 나무와 대리석 교회들,

또 저만치 앞쪽에서 아르노강이 강둑에 부딪히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유쾌했다.”

영국의 문호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는  소설 '전망 좋은 방'에서 피렌체 의 아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아침을 맞는 일은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굳이 두오모가 있는

구시가(역사지구) 한 가운데 숙소를 잡거나 아르노강이 흐르는

 강변에서 하룻밤을 청하는 것은, 오랜 유산들이 쏟아내는 향기와

 싱그러움이 교차되는 묘한 분위기에 취하기 위해서라고들 합니다.

 

창문 한 편으로 두오모의 빛 바랜 외벽이 보이고, 종소리까지 은은하게 들려오면

몸은 마법에 이끌리듯 창밖으로 유체이동을 시작합니다.

 

 

'꽃'이라는 의미가 담긴 도시,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 피렌체는 사계절 화사하답니다.

피렌체 역사지구는 중세의 유적과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대리석 위에

꽃피워내며, 구시가 어느 골목을 거닐다가 길을 잃어도 고풍스러운 건물과

그 건물이 간직한 예술작품, 사연들은 그림자처럼 뒤를 쫓는답니다.

 

 

피렌체는 걸어서 사색하기 좋은 도시입니다.

역사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이탈리아 예술의 수도'라는

피렌체의 별칭이 결코 과하게 다가서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단테,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카치오, 미켈란젤로...

열거하기에도 벅찬 대가들이 피렌체에서 태어나거나 흔적을 남겼던 예술가들입니다.

 

두오모,  우피치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산 로렌초 성당, 베키오 다리......

 피렌체 역사지구를 단아하게 채색하는 유적들도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피렌체 사람들의

 도도함은 ‘패션 1번지’ 밀라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 준답니다.

 

밀라노에서 처럼 옷깃을 올려 세운 날렵함이 아니더라도

도심 깊숙이에서 풍겨나는 예술향이 그들의 자부심을 부추긴다고 하네요 ^^

 

 

이탈리아 제정시대의 피렌체는 토스카나·움브리아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상태였다고 합니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서 독립하고 좌안의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으며,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 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겔프)과 황제당(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시뿐만 아니라

전 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 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과 흑당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습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가  시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및 손자인 대 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답니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피렌체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년 8월에는 영국·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답니다

 

 

언덕 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피렌체 역사지구의 아득한 풍경.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

 

400년전 피렌체 수도회의 약국에서 기원된 화장품 브랜드로

전통 제조법을 그대로 계승해 핸드메이드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고

전 세계 주요 도시에 피렌체 매장의 컨셉을 유지한 매장을 한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도산 공원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 매장이 있답니다.

 

피렌체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로 제품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해

이탈리아를 다녀오는 사람이면 꼭 사오는 브랜드 입니다.

 

또한, 고현정, 서인영 등의 많은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의

팬임을 자처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고현정 크림'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의 제품들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고현정 크림'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는 그보다 더 특별한

셀레브리티가 있답니다.

 

지금의 재벌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부를 축척한 16세기의 메디치 가문 부터

17세기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 그야말로 로열 패밀리의 편애를 병 위에 얹고 위풍당당 유럽을

넘어 인도와 중국에까지 수출된 브랜드가 바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입니다.

 

 

당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의 수도사들은 메디치가의 카트리나 공주와

프랑스 앙리 2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향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산타 마리나 노벨라의 베스트 셀링 향수인

'아쿠아 디 콜로니아'로 석류를 닮은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이 특징이

남녀 공통 향수랍니다.

 

 

'아쿠아 디 콜로니아'는 카트리나 공주 일행이 파리에 도착한 뒤 현지에서

'왕비의 물(Acqua Della Regina )'라 불리며 대중에게 까지

유명해 졌는데 후에 '오드코롱(Eau De Cologne)'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일들이 16세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로 그때로부터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고집스러운 전통의 방식으로

400년 동안 한병 한병 수작업으로 향수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은 매장 내부가 굉장히 넓어서 각 관마다

안내 데스크가 있고 그곳에서 샘플링 테스팅을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내부가 너무 화려해서 꼭 궁전 같다고 하네요

 

 

매장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한국어로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찾는 곳이란 걸 알게 된답니다.

매장 내부에도 한국어 안내 브로셔가 가장 많았다고 .......

 

 

또한, 매장 내부 고객들 대부분이 한국인 이었다고 합니다.

 

 

인수는 여행가기전 누나가 부탁한 '고현정 수분크림'을 이곳에서

바로 구입했다고 하네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부근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Novella)

 

1278년 당시의 도미니크파 최대의 고딕식 성당으로 착공되어,

1300년에서 1350년 사이에 일단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설계와 지도는 후라 시스토와 후라 리스트로 두 설교승이 맡았는데,

이 두 사람은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라 성당의 조영에도 관계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체의 외관은 얼핏 보아 다소 높고 단순한 풍바실리카풍으로,

내부는 간결한 교차궁륭으로 덮여 있는 3랑식 회당부와 직선적으로 정리된

횡당과 내진으로 되어 있으며, 경쾌한 궁륭과 이를 지탱하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열주를 비롯하여 모든 면에 걸쳐 불필요한 장식을 극력 생략함으로써

명쾌하고 정돈된 공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현재의 르네상스식  서쪽 정면은, 뛰어난 예술가이며 또한 이론가로 알려졌던 알베르티가

중앙의 둥근 창과 맨 밑부분의 장식 등 낡은 기존의 부분을 교묘히 살리면서

새로 구성한 것으로 1456년경의 작품이랍니다.

 

 

 이것은 이 도시의 대성당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토스카나 지방에서 성행했던 이탈리아 특유의 장식법으로,

색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기하학적 무늬는 밝은 양광에 비치어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

일찍이 미켈란젤로가 ‘나의 신부’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는 성당이랍니다. 

 

 

 

내부에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성모전'과 '세레자 요한'  

신랑부에는 마사치오의 벽화 '삼위일체'가 남아 있으며,

 부속의 스페인 예배당에는 안드레아ㆍ다ㆍ피렌체의 '교회의 승리',

스토로치 예배당에는 나르도ㆍ디ㆍ치오네의 '천국과 지옥',

올카냐아의 '대제단화' 와 필리피노 리피의 '마르스 신전올 지키는 악마',

키오스토로 벨데에 우첼로의 '홍수'의 벽화가 있습니다.

 

 

산 조반니 세례당 (Battistero di San Giovanni)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서쪽 정면 광장에 있으며, 이 대성당의 부속세례당으로

1128년까지 피렌체의 구대성당이었으나 현재의 대성당이 건립된 뒤에 세례당이 되었습니다.

 

이 당은 직경 25.6m의 팔각형 플랜이고, 그 위에 대원개(쿠폴라)를 올려 팔각지붕을 덮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고대 말기의 세례당 터에 세워진 11세기 후반의 건축으로 12세기 초에 완성.

 1202년 서벽을 넓혀서 스카르셀라라고하는 후당을 건립했으며,

외벽은 백색과 녹색의 대리석에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고  남ㆍ북ㆍ동에 문을 달았으며,

 후에 그 문의 각각의 부조로 유명한 청동문비가 추가되었습니다.

 

 

 

제일 남쪽의 문은 안드레아 피사노 작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와

가톨릭의 덕목우의상을 나타냈는데, 지난날에는 동쪽 문이었다고 합니다.

 

제2(북쪽), 제3(동쪽)의 문은 기베르티가 1401년에 실시한 콩쿠르의 결과로 위촉되어

 제작된 것으로 제2문에는 '그리스도전', '사복음서기자', '성자전'을 나타내고,

 제3문에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건물의 내외가 모두 고대 혹은 고대를 모방한 원주로서 장식되어

쿠폴라와 함께 고대 부흥을 꾀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답니다.

 

내부장식은 '최후의 심판'의 대구도를 중심으로 해서 9계단의 천사군,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대홍수까지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 '그리스도전',

'세례요한전'을 나타낸 모자이크가 원개를 장식했고,

후당의 천장에도 ‘작자명 야코포 1225년 이라 기입된 모자이크 장식이 있습니다.

 

후당에는 도나텔로 작품인 '발다사레 코샤의 묘비' ,'막달라의 마리아. 목상이 있습니다.

 

 

천국의 문 ( Porta del Paradiso )

 세례당 동쪽에 설치된 기베르티 제작의 제3청동대문(1425~52) 으로,

 두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구약성서' 이야기를

청동에 금도금 하여 부조로 나타내었습니다.

 배경의 건물과 풍경에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냈고,

‘조각을 회화화하였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라고 말한 이후

'천국의 문'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약 성서의 이야기를 부조로 나타낸 '천국의 문'

세례당 내부는 일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구경을 못했다고 합니다.

 

 

조토의 종탑  (Campanile di Giotto)

 

피렌체 출신 화가 조토와 그의 제자 피사노가 함께 작업해 14세기 말에 완성한 종탑입니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외관은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을 이용해 정교하게 만들었으며,

종탑 최하단에 장식되어 있는 붉은색 패널 안에 있는 부조는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입니다.

 

 

현재 종탑에 장식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으로, 원작은 두오모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414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높이 84m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두오모의 웅장한 모습과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답니다.

개장시간: 8:30~19:30"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e)/피렌체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두오모)는 산 조반니 세례당과

 조토의 작품인 종탑을 비롯한 건축물군의 일부랍니다.

 

세 건물 모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색깔 있는 대리석의 가로 세로 띠로 시각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13세기 말, 산타 레파라타 대성당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피렌체 정부는

피사와 시에나의 그것을 뛰어넘는 새 두오모를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 교회 건설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고딕 아치로 나뉜 하나의 네이브와

두 개의 아일, 그리고 건물 뒷편의 팔각형 돔)로 시작되었습니다.

 

 

조토 디 본도네는 평생토록 캄파닐레(종탑)를 지었으며

안드레아 피사노는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사에 매달렸습니다.

 

수많은 건축가들이 신속히 그 뒤를 이어 종탑을 완성하고 앱스와 측면

예배당을 확장하였으며 네이브 공사를 마쳤습니다.

 

여섯 개의 측면 스테인드글라스 창 역시 추가되었는데, 그중 트랜셉트에 가까운

네 개만이 빛을 통과시키고,  정교하게 장식한 외관과 엄격하리만치 간소한 실내는

확연한 대비를 이루는데, 당시의 대성당은 보통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챈슬 위에 쿠폴라를 올리는 엄청난 작업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 맡겨졌는데,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이중 벽 원형 돔에서 영감을 얻어

나무와 벽돌을 주 재료로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의 혁명적인 공학 설계(지붕 대신 드럼 위에 수평 지지대를 놓고

 팔각형 이중 벽 쿠폴라에 올린)덕분에 더 이상 스캐폴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결과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이 탄생하였습니다.

두오모가 마침내 완공되었을 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였다고 합니다. 

 

 

건물 전체를 덮는 대원개의 프로포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원개(쿠폴라)중심의

구성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깊다고 합니다.

 

돌로 만든 원형 돔으로는 서유럽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이 붉은 돔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렌체에 온 보람을

느낀다는........

 

 

피렌체의 전경을 보기 위해 붉은 돔인 쿠폴라의 464개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붉은 원형 돔(쿠폴라) 천정에 그려된 화려한 프레스코화

 


쿠폴라에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다본 풍경

464개의 계단을 올라간다고 엄청 다리가 아팠다고 합니다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돔(쿠폴라)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의 야경

85m 높이의 조토의 종탑도 보이고.......

 

 

한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피렌체의 화려한 야경

 

 

 

 

 

  

 

조토의 종탑 총 414개의 좁은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84m 종탑의 꼭대기 전망대에 있는 '종'

 

 

조토의 종탑에서 내려다 본 두오모와 붉은 지붕의 피렌체

 

저 멀리 석양이 지고 석양과 어우러진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이

도시 전체를 몽환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눈 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현실이 아닌것 같은^^

 

 

공화국 광장 (레푸블리카 광장 Piazza della Republica)


현재의 공화국 광장은 19세기에는 오래된 시장 거리가 남아 있던 동네였습니다.

 

 

피렌체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면서 현대화에 들어갔고,

 외국 거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옛 건물들은 헐리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광장 주변의 고풍스러운 카페들은 여전히 그 시대의 국제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공화국 광장내의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의 이름을 딴 '기우베 로세'는

20세기 초반 독일인 형제에 의해 열린 카페로 피렌체의 독일인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다가,

곧 이탈리아 미래주의자의 살롱이 되었다고 합니다.

 

 

공화국 광장의 길거리 악사

 

 

베키오 궁전 ( Palazzo Vecchio : 피렌체 시청사)

 

처음에는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지도자들의 궁전)라 불렸던 이 육중한 도시 건축물은

1229년 시 의회의 명에 따라 지어졌는데, 도시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 만한

적당한 장소로 삼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피렌체 주요 길드의 대표자들이었던 지도자들은 당시 이 도시의 주도적인

 지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1298년에 착공하여 몇 번에 걸친 개조 공사를 통해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1540년에 코시모 공작 1세의 명으로 바사리가 내부를 개조했답니다.

일찍이 피렌체 공화국(토스카나 공화국)의 청사였던 건물로,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키오 궁전 내부

 

 궁전 오른쪽 입구로 계단을 올라가면 대청으로 들어서게 되며,

 대청 양쪽 벽면에는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이 있으며,

3층에는 기를란다요의 로마 영웅들을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마키아벨리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지구의 방 등

옛날 피렌체의 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유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

 

시뇨리아 광장은 13~14세기에 만들어진 광장으로, 중세 이후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주변에는 시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피렌체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우피치 미술관이 있으며,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넵투누스 분수>와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등 광장 곳곳에는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동상들이 서 있답니다.

 

 

 코시모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

 

 

넵투누수 분수

 물의 요정에 둘러쌓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넵투누스 분수 옆의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랍니다.

 

 

피렌체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동상들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

 

 

잠볼로냐의 '사빈 여인의 강간'

 

 

켄타우로스를 죽이는 헤라클레스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미켈란 젤로의 '다비드'

모조품으로 안전상의 문제로 지금은 아카데미 미술관에 있지만

1872년까지는 이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시뇨리아 광장의 구찌 박물관(GUCCI MUSEO)

 

 

우피치 미술관 (Galleria degli Uffizi)

 

우피치 미술관은 본래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국이었습니다.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이란 뜻으로, 1560년경 코시모 1세가

 피렌체의 행정ㆍ사법기관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한 건물 건립을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14년 후 바사리는 메디치 가문의 사무소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국인

이 건물을 완성했고,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미술부터

현대 작품까지 2,500여 점의 작품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데, 2층은 데생과 판화,

3층은 회화 전시실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예배>와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자화상>,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유명 작품은 주로 3층에 전시돼 있답니다.

 

미술관 한 모퉁이에는 '바사리의 회랑'이라는 긴 복도 모양의 건물이

 베키오 다리로 이어져 있으며, 베키오 궁전과 아르노강 건너편의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이 회랑은 길이가 약 1km에 이르며 세계 최대의 초상화 전시로 유명하답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예약을 하지 않으면 2~3시간을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으며, 미술관 건너편에 예약하는 곳이 있으므로,

관람 하루 전에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답니다.

미술관 공통 예약 사무소(055 294883/2347941, 영어 가능)에 전화해 이름과 국적,

희망 날짜와 시간을 말하고 예약 번호를 받으면 되고,

홈페이지에서도 예약이 가능하답니다. 개장시간: 8:15~18:50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아르노강 위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45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알려져 더 유명한 다리......

 

 

1944년 연합군의 추격을 받던 독일군이 강 양쪽 기슭의 집을 모두 파괴했으나

베키오 다리만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14세기부터, 베키오 다리는 상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장소였는데,

그 큰 이유는 이곳에 가게를 차리면 세금 면제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원래 이 다리에는 푸줏간, 대장간, 가죽 처리장 등이 있었는데

 1593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시끄럽고 악취가 난다며 모두 추방하였고 

대신 금세공업자들이 다리 위의 상점에 세들었답니다.

 

 

베키오 다리 위의 상점들

 

이후로 지금까지 베키오 다리의 금세공 상점들은 다양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판매하는 수공예 제품들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답니다. 

 

 

베키오 다리 위의 금 세공가 벤베누토 첼리니의 기념비

 

베키오 다리 위에는 피렌체 출신의 가장 유명한 금 세공인인 벤베누토 첼리니의

기념비가 서 있답니다.

 

 근대의 이 지방 전설에 따르면, 첼리니의 흉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강에 던져 버리면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러한 일로 다리가 손상을 입게 되었으므로,

이 전설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이제 벌금을 물게 된다고 합니다.

 

 

알레 그라치에 다리  (Ponte alle Grezie)

'감사의 다리'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여기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 베키오 다리와 마주보고 서 있답니다.

 

 

 

산타 트리니타 다리

아르노강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다리로

이 다리와 연결된 피렌체 패션 일번지 토리 부오니에는

페라가모의 본사가 있답니다.

 

 

피티 궁전(Palazzo Pitti)

 

1448년 은행가 루카 피티가 위세등등한 라이벌 가문인 메디치가를 누르려고 짓기 시작하였으나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사후 메디치가가 매입하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했다고 추정되며ㅡ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작게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소유권이 메디치가로 이전된 후 1549년에 확장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되고 개조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답니다.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였을 시절에는 로레인 왕조와

 사보이아 왕조의 저택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피티 궁전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과 갤러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팔레티나 갤러리는 대공의 개인적 수집품부터 15~17세기 티치아노,

 라파엘, 루벤 등 유명한 화가들의 걸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현대 미술 갤러리(Gallery of Modern Art),

박물관(Silver Museum), 의상 갤러리(Costume Gallery),

마차 박물관(Carriage Museum), 자기 박물관(Porcelain Museum) 등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궁전 정원인 보볼리 가든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속하는데,

메디치 가문이 피티 궁전을 산 후인 1549년 트리볼로에 의해 디자인되었으며,

르네상스식 정원으로 숲, 가로수길 사이로 조각상들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정원에서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와 유명해진 피렌체 두오모의 모습이 보인답니다.

 

 

피렌체에서 만난 반가운 한국인 !!

 

 

현재 피렌체에서는 2014년 안녕  코리아 축제가 열리고 있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여행도 하면서 한국 알리기 축제를 기획하여

외국인들과도 소통하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문화를

알리는 행사라고 합니다.

 

 

세계속에 한국을 알리는 홍보 축제라고 하네요 !!

 

 

한국의 전통 놀이 등을 알려주기도 하고

 

 

우리 떡을 전시하여 피렌체에 온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한국 고유의 음식인 떡을 선보이고 알리기도 한답니다.

 

여름 행사에는 아들도 꼭 신청해 보라고 해야 겠어요!!

유럽 5개국 여행과 함께 한국을 알리는 홍보 !! 유럽드리머즈.....

 

 

우피치 미술관(좌측)과 갈릴레오  박물관 (오른쪽 건물)

 

갈릴레오 박물관은 갈릴레이의 유해에서 떼어낸 손가락 3개와 어금니 1개를

일반에 공개 중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에서 갈릴레이의 유해는 마치 성자의 유품과 같은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는데
갈릴레이를 기념하고자 이름을 바꾼 피렌체 과학역사박물관은

전시에 앞서 개.보수 공사를 하기도 했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가톨릭 교단으로부터

1633년 이단으로 몰렸던 갈릴레이는 신자들의 믿음과 가톨릭 교단의

권력에 대한 과학의 반격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갈릴레오 박물관의 파올로 갈루치 관장은 "갈릴레이는 세속에 존재했던 성자"

라면서 "그의 유해는 사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의 상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진실을 추구했던 그의 육신은 1642년 죽음 이후에도 편안히 쉴 수가 없었는데요
이단자로 규정된 그에게 적절한 묘지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사후 100여년이 지난 1737년에야 이장됐다고 합니다.

이장 때 참여한 박물학자들이 칼로 그의 손가락과 치아, 척추 등을 도려내

기념으로 보관해왔지만 손가락 2개와 치아는 1905년 분실됐으며,

2010년 10월 경매시장에 우연히 등장해 다시 빛을 보게 됐다고 합니다.

1992년 가톨릭 교단은 당시 그를 이단자라고 규정한 재판관이 실수를 범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갈릴레이 자체에 대해선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곡을 피해갔다고 합니다.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세계관을 뒤집었다는 죄목을 적용받은 이단자였지만

막상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답니다.

 

 

피렌체에서 먹은 점심 메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부근의 맛집이라고 하는데요

라자나와 돼지고기 메뉴라고 합니다.

 

 

가격은 주 메뉴 2개와 물 및 식전 빵 포함해서 16.50 유로로 비교적

괜찮았다고 합니다.

 

내일은 인수와 함께 피렌체의 프라다 스페이스와 더 몰

구경을 간다고 하네요

여행의 막바지를 달리면서 여행 초반에 비해 아름다운 건축물과 풍경들에 대한

감흥은 많이떨어졌다고 하는데..........

 이제 유럽 배낭 여행 65일 일정도 어느듯 막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4일  남은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여정 !!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날들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