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지구 한바퀴/프랑스

유럽여행 33일째 (프랑스 파리)2013년 12월 16일(월)

이쁜 비올라 2013. 12. 19. 05:27

오늘은 프랑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랍니다.

프랑스에서는 11일을 머물렀는데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프랑스 마르세유로 들어와 2박을 하고 파리에서만 9박을 했답니다.

저녁 열차로 다음 여행지인 룩셈부르크로 간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마지막날 아들과 인수는 어느곳을 다녔는지

지금부터 파리의 마지막 포스팅을 해 보겠습니다 !!

 

 

파리의 시청사 건물입니다.

 

시청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랍니다.

루이 9세가 파리 시민에게 시장 선출권을 부여한 것을 계기로 지어졌으며,

이후 프랑스 혁명 때 전소됐던 건물을 재건축한 것입니다.

 

 

 내부에는 고전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연회장이 있고,

유명한 예술작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겨울에는 시청사 바로 앞에 무료 야외 스케이트장이 들어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답니다.

견학하려면 반드시 예약해야 합니다. 

 

 

 

포앵 제로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에 위치한 팔각형 안에 있는 별모양의 표시로

프랑스 거리 측정 기준이 되는 곳입니다.

이 곳을 밟게 되면 파리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노트르담 대 성당

12세기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센강 시테섬에 자리해 있습니다.

1163년 모리스 드 쉴리 주교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해 약 3세기에 걸쳐 완공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가 인기를 얻은 후랍니다.

 

 

파리의 센강 시테섬에 있는 성당으로 공사는 1163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內陣)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단정한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로 유명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뜬 지름 9.6m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m 높이의 직사각형 쌍탑이 얹혀 있습니다.

3개의 출입구는 북쪽은 ‘성모 마리아의 문’, 남쪽은 ‘성 안나의 문’,

중앙이 ‘최후의 심판 문’으로, 문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窿)으로 덮인 길이 약 130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 웅대한 건축으로, 신랑 양측의 열주(列柱)·트리포리움( 명층 아래 연이은 층)

명층(明層:높은 창)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힘차게 활 모양을 그린 다수의 비량(飛樑)으로 지탱된 남북의 측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명층이 줄을 잇고, 중앙 부근에 돌출한 익랑(翼廊) 끝 부분에는

지름이 13m나 되는 유명한 장미의 창과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습니다.

익랑과 신라의 교차부에 치솟은 첨탑(尖塔)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랍니다.

 

 
이 대성당은 루이 16세의 결혼식,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

민예배(1944.8.26)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답니다.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던 곳으로도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데,

특히 ‘장미창’이라는 별칭을 가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색색의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큰 종도 볼 수 있답니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에 방문객들의 소원을 담은 쪽지를 넣는 곳이 있어서

아들도 소원을 담아 글을 남겼네요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정말 아름다운 내부인것 같습니다.

 

 

 

 

 

 

 

 

 

중앙 출입구인 ‘최후의 심판 문’으로, 문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파리 법원

프랑스 법률을 주관하는 곳으로 파리의 '정의의 전당'이라 불리는 법원

시테섬의 최고 재판소로  법원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생트 샤펠 성당

오른쪽으로는 콩시에르쥬리가 위치하고 있답니다.

 

 

생트샤펠

파리 시청과 파리 법원 사이에 있는 건물입니다.

 

1248년 루이 9세에 의해 지어진 성당으로 예수의 가시 면류관 등 종교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서양건축사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86개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압권입니다.

 

 

파리의 시테섬(島)에 15세기까지 있었던 구왕궁 안에 1245~48년 건조된 고딕식 예배당.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십자가 단편 등의 성유물을 모시기 위해,

성왕 루이 9세(Louis Ⅸ, 재위 1226~70)의 명에 의해 건조한 것으로 상하 두당으로 됨. 상

당은 왕족용으로 왕국에 접속되어 있고 하당은 일반용. 길이 36m, 폭 17m, 높이 42.5m.

상당은 벽이 없는 전형적인 고딕 공간을 구성하며 높이 약 15m에 달하는 15개의 창에는

 『그리스도전』을 중심으로 『구약성서』에서 따온 1134의 장면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나타나 있음.

 서쪽의 장미창은 「묵시록」에 의한 15세기 말의 것임 .

18세기 이래 이 건물이 창고로 사용됨에 따라 손상이 매우 커서 19세기에 중수했습니다.

 

 

콩시에르쥬리

 

 14세기 옛모습을 그대로 지닌 콩시에르쥬리는 감옥과 단두대로 가는 입구로서

'공포 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 곳에 수감되었던걸로 유명하며 그 독방도 재현되어 있습니다.

현재 일부가 자료관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노트르담 사원 근처에 위치한 콩시에르쥬리는  필리프 4세에 의해

1284년에서 1314년에 파리 최초의 궁전으로 처음 건축되었고,

 왕실 전용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가, 후에 건물을 증축하여

왕실의 연회를 개최하는 연회실과 재판정으로 사용되었고, 

가드룸(Guardroom)은  왕이 입회하는 의회의 개회시에 대기실로

사용되었습니다.

1358년 궁전을 루브르로 옮긴 후 의회와 국왕의 중앙집행부로 사용되었으며

1391년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감옥에는 일반 죄수와 

정치범을 함께 수용했으며 부(富)· 지위· 관계 등에 따라 죄수들의 취급이 달랐답니다.

 중세에 건축된 시저타워(Caesar Tower), 실버타워(Silver Tower),

봉벡타워(Bonbec Tower)가 남아 있습니다.

실버타워는 왕실 보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봉벡타워는 시계탑으로, 1370년 처음으로 시계가 설치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시계는 1535년에 설치한 것입니다.

 

 

공포정치 기간동안에는 콩시에르쥬리는 재판정으로서 단두대로 가는 대기실로 사용되었고

1793년부터 1795년까지 약 2600명이 이곳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시인 셰니에(Andre Chenier),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인 당통(Georges Danton)을 포함한 지롱드당원 등도

이곳을 거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정으로 향할 때 생루이 방(Salle Saint-Louis)를

지나게 되어 이 방은 '불운의 방(Salle des Perdu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네요.

19세기 부르봉 왕조의 부활 후에는 고위층을 위한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도 이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되었던 방은 루이 18세에 의해 왕비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예배당으로 개조되었으며, 19세기 중엽 콩시에르쥬리와 재판소의 외관은

공포정치의 산실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술가의 다리인 퐁데자르 다리

 

 

자물쇠를 채워서 센강에 던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풀지 못한다는

로맨스가 있는 퐁데자르 다리의 자물쇠들

 

 

어제는 루브르 박물관 야경을 보고 오늘은 이렇게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을 직접 관람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슈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답니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는데,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외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품은 오늘날 30만 점가량에 이른답니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관심 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해 미리 동선을 짜두는 것이 좋답니다. 

 

 

입장료는 12유로랍니다.

 

 

루브르 정문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돼 있는데,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에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 당시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리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면 나폴레옹 홀로 이어지는데,

안내 센터, 매표소, 서점, 휴대품 보관소, 뮤지엄 숍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티켓이나 필요한 가이드북을 구입하고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할 수 있답니다. 

 

 

전시관은 드농(Denon)관, 리슐리외(Richelieu)관, 쉴리(Sully)관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각각의 전시관은 지하에서 3층까지로 이뤄져 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므로

 가능한 한 같은 층에서 다른 전시관으로 옮겨 다니며 감상하는 편이 좋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모사 작가들의 활동을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건 미리

사전에 박물관 측으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발 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작품)

 

화가가 젊은 시절 '목욕하는 여인'을 주제로 그렸던 누드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그가 오랜기간 탐구하고 추구해왔던

이상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이 잘 구현되어 있답니다.

 

2층(1 er étage)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 항상 붐비는 곳이랍니다.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돼 있습니다.

 

3층(2 éme étage) 역시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놓았는데,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무척 인기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플랑드르•

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 루벤스, 베르메르 등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터키탕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화가가 데뷔하고 처음 로마에 머므르고 있던 시절

하렘(이슬람 국가에서 부인들이 거쳐하는 남성 출입금지 구역)의 정경에

마음을 빼았겼다고 합니다.

영국 대사의 부인이 쓴 [몬테규 부인의 서간집]에 묘사된 터키에 있는

한 목욕탕의 정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화면 가득 묘사된 관능성과 다양한 육체 표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묘한

분위기의 비현실적인 색채는 퓌비 드 샤반느, 폴 고갱과 같은 다양한 화가와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작업의 초석이 되었으며, 마티스,큐비스트,피카소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 (프랑스화파, 16세기경)

 

그림 속에서 왼손의 두 손가락에 사파이어 반지를 들고 있는 여인이

가브리엘입니다. 이 반지는 가브리엘이 곧 프랑스의 왕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즉위식 반지로 추측합니다.

오른쪽 여인은 가브리엘의 동생 빌라드 공작 부인으로 그 여인은 왼손 두 손가락으로
언니의 젖꼭지를 살짝 쥐고 있는데 당시에는 젖꼭지의 상태로 임신을 판단했고

때문에 이것은 가브리엘이 임신을 했다는 의미의 행동으로 , 하지만 가브리엘의

배가 욕조 아래에 가려진 탓에 임신 여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며, 16,17 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은근이 성행한 동성애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 그림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모든것이 추측일뿐 진행된것은 하나도 없으며,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일어난

가브리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이 그림을 더욱더 미스터리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3세 아파트

 

나폴레옹 3세가 루브르에 머물렀던 때의  모습이

루브르 박물관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원목과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의 모습이랍니다.

황금으로 치장한 거실 모습이......

 

 

화려한 샹들리에와 가운데 챔발로도 보이고.....

 

 

거실의 쇼파와 벽난로 고급 카페트,황금 실내 장식들이

정말 그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실감나게 해 주는 것 같네요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천장을 두른 황금 장식

 

 

지하층(Entresol)에는 고대 오리엔트•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

스페인•북유럽 조각품이 전시돼 있으며,. 프랑스 조각품은 지하에서 1층에 전시돼 있답니다. 

 

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함부라비 법전 리슐리 외관 1층에 있음

 세계법률의 기초가 된 함부라비 법전

 

아르테미스

 

 

1층(Rez-de-chaussée)에는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 미술품도 전시돼 있는데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밀로의 비너스 상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하는데,

1820년 4월 8일 에게해에 산재하는 키클라데스제도의 하나인

밀로스섬(밀로섬 또는 멜로스섬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을 거쳐 루

이 18세에게 헌납되어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수장되었답니다.

발견 당시 이 여신상은 고전기(古典期)의 거장 브락시테레스의 원작이라고

떠들썩하였으나, 그 후 연구 결과 현재는 BC 2세기에서

BC 1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품위 있는 머리부분이라든지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우아한 몸매의 표현에는

 BC 4세기적인 조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두발(頭髮)의 조각과

하반신을 덮는 옷의 표현은 분명히 헬레니즘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 고전적인 자태는 헬레니즘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의 부활이라는 당시의 풍조에서 태어난 걸작이랍니다.

허리부분을 단면으로 하여 상하(上下) 두 개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팔이 없는데 없는 부분의 복원(復元)에 대해서는

그 제작연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나 미술사가 사이에서

계속 많은 고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른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지고 왼손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제쳐진 손바닥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821년 루브르미술관에 수장된 후 두문불출의 명작으로도 유명했으며,

1964년 처음으로 세계나들이를 한 바 있답니다.

 

 

대형 스핑크스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

 

아퓔레의 황금 당나귀에서 영감을 얻은 영원한 테마를 다룬

작품으로 에로스가 잠든 프시케를 소생시키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키스하는 두 육체의 역동적인 모습과 삼각 구도 구성을 통한

영혼의 고통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며, 대리석에 대한 빛의 효과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함이 돋보입니다.

 

 

[교황 율리오 2세 무덤의 죽어가는 노예] 미켈란젤로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며,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고

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1830년에 제작되었고 그림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이는 알레고리로 표현된

자유의 여신으로서 공상적인 현실, 즉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비현실의 진리를 대변합니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10월 18일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답니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케이트전(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7월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답니다.

들라크루아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감성과 개성,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여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로서, 회화 기법에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 표현주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831년 살롱에 출품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7월왕정의

수반인 필리프가 작품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3세 때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진열되기도 하였으며,

 들라크루아가 죽은 뒤인 1874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사회적 화제가 된 당대의 사건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는데,

1816년 여름, 난파된 메두사호의 생존자 15명이 기적적으로 구조되고,

 이를 둘러싼 갖가지 풍문이 떠돌자 제리코는 이 사건을 한 작품으로 구상합니다.

 

군인들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에 정착할 이

주민 등 400여 명을 태운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한 것은

 1816년 7월 2일이었다.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 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50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된 것은

 15명뿐이었으며, 생존자들이 굶주림을 못이겨

죽은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었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과 시련은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건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장면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제리코는 오랜 표류 끝에 멀리 수평선 위로 나타난

아르귀스호의 모습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생존자들을 찾아 다니며  증언을 듣고  뗏목의 모형까지 만들었습니다.

다시 시체 안치소를 찾아가 시체의 상태를 연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화면 구성을 위한 많은 데생 스케치를 거쳐

1819년 이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그림은 동적인 구도, 뛰어난 명암법 사용과 색채 효과 등으로

극적인 장면을 표현함으로써 그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819년 아카데미아에 처음 출품하였을 때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  이에 실망한 제리코는

1820년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영국에서는 이 그림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19년)

 

앵그르의 걸작 중 하나로  이국풍의 나부가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를 하고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그림으로, 유연한 곡선과 아름다운 피부가 압권입니다.

'오달리스크'란 터키 황제의 신변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그랑드 오달리스크'란 곧 '큰 노예'이랍니다.

이 작품은 앵그르가 이탈리아에 체류할 때 나폴리 왕국의 카로리네 여왕의

주문에 의해서 완성한 작품으로, 당시 근동 지방에 뻗친 프랑스의 세력과

 함께 세인들의 이목을 끈 터키의 풍물에 대한 관심과 취미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1세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1804년)

 

고전주의미술의 창시자인 다비드의 1807년 작품으로,

  다비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미술관계의 제도개혁에 관여하며

황제의 제1화가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을 만난 다비드는 열렬한 나폴레옹 추종자가 되었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등 황제를 찬미하는 대작을 여러 점 남겼습니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을 강조하여 나타냄으로써

역사의 극적인 순간을 재현시켰는데,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다비드의 회화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있었는데 다비드는 그 해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아

다음해 12월이 되어서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대관한 후에 황후가 될 에조제핀에게

관을 씌워 주는 광경으로 교황 피우스 7세가 대관을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며, 이러한 화면 구성은 나폴레옹의 권력이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지 타인으로부터 수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폴레옹과 관계된 모든 인물이 등장하며 제각기 개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내용을 독자적으로 강조하고

각 인물의 성격과 심리적 반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1810년에 전시되었으며 다비드는 이 작품으로 나폴레옹의 10년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모나리자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품)

 

 

유채(油彩) 패널화로 크기는 세로 77㎝, 가로 53㎝입니다.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하는데,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입니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를 통하여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으며,

 따라서 본명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입니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城)에 수장되었습니다.

 때때로 세정(洗淨)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하며,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 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

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며,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문것 같네요^^

 

 

가나의 혼인잔치 (칼리아리 파올로 베로네세)